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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판타지 너머 ‘SF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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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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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사유의 즐거움 안기는 과학소설 봇물… 다양한 하위 장르 선보이며 독자층 넓혀

SF거장들의 대표작이 잇따라 나왔다. <빼앗긴 자들>과 <전도서…>는 20~30년 전에 출간된 고전이며 <어스시…>는 마법사의 모험을 다뤘다.
2002년 초반 해외 번역문학의 화두가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J. K.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로 대표되는 판타지였다면, 후반기의 그것은 단연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이하 SF)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월드컵을 마치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무려 10종이 넘는 SF가 출간된 것은 팬의 입장에서는 근 10여년 만에 맞는 경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SF 팬들이 느끼는 ‘행복감’이 실은 가뭄에 콩나듯 나오다 금세 절판돼버리는 번역 SF에 대한 상대적 기아감에 기인한 것이고, 최근 출간된 SF의 과반수 이상이 예전에 이미 출간된 고전들의 복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2003년 출판계 흐름을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현상이다.

환상문학 떠올라 본격 SF 시대 열려

이 흐름은 몇 가지 복합적 요인이 작용해서 생겨난 것이지만, 일반적인 이유를 들라면 역시 장르소설 시장이 10년 전보다 질적·양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SF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상위개념으로서의) 환상문학의 대두를 소비자인 동시에 ‘창조자’기도 한 N세대의 문화적 유연성에 결부시키거나, 상상력이 고갈된 나머지 가사(脚쩔 『滑阪′畸뭐隙퐈×돛鰥 」耗〈징≠吠陸 나아가서는 포스트모던한 패러다임 전환으로까지 ‘승격’시키려는 성급한 시각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친 1차 SF 출간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SF’에 대한 출판 관계자들의 눈길은 언제나 호의적이었으므로, 판타지붐으로 촉발된 최근의 상황 변화가 좀더 본격적인 고급 SF의 번역출간을 가능케 했다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가장 눈에 띄는 예로는,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황금가지, 2002)과 로저 젤라즈니의 중단편집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열린책들, 2002)의 출간을 들 수 있다. SF사(史) 시점에서 보면 양쪽 모두 20, 30년 전에 출간된 고전이지만, 과거의 번역출간을 통해 이미 국내에서 일정한 팬들을 확보한 거장들의 대표작이 신간 단행본으로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고명한 인류학자인 아버지와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명문대학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한 르귄은, 약간 시대착오적 표현을 빌리면 재원(才媛)이라는 표현이 걸맞은 신인작가였다. 향후 30여년에 걸쳐 꾸준하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친 르귄은 문화상대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장려한 미래역사를 자아낸 <헤인 우주> 연작과, 자아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고독한 마법사 게드의 육체적·정신적 모험을 다룬 <어스시의 마법사>(황금가지, 2002)를 발표함으로써 부동의 명성을 쌓았다. <어스시…>가 <반지의 제왕>에 비견되는 고전 판타지라면, <빼앗긴 자들>은 <어둠의 왼손>(시공사, 2002)과 더불어 르귄의 본격 SF를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과학적인 ‘교류’를 성공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체제화된 아나키즘이 지배하는 고향인 행성 아나레스를 떠나 ‘사악한’ 자본주의의 통제 아래 있는 쌍둥이 행성 우라스로 간 물리학자 쉐벡의 모험을 묘사한 이 장편에서, 르귄은 정치문화적 알레고리에 천착하는 대신 단아한 문체를 통해 미래사회의 중층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커다란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

신화·SF·환상 결합해 완성도 높여

386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과학소설이 번역출간되고 있다. 같은 제목의 책이 거의 동시에 나오기도 했다.
뛰어난 문학성을 토대로 신화·SF·환상을 결합한 지적인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일세를 풍미한 로저 젤라즈니 또한 르귄과 마찬가지로 SF와 환상문학계 양쪽에서 거장의 자리에 오른 작가며, 대학에서 심리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점에서도 르귄과 세대적·환경적인 공통점을 엿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신들의 사회> <내 이름은 콘라드>와 판타지 시리즈인 <앰버 연대기> 등의 장편이 먼저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지만, 플롯의 탄탄함과 심미적인 완결성을 들어 젤라즈니의 장편보다는 중단편쪽을 더 좋아하는 평론가들도 적지 않다. 주류문학과 장르문학의 간극을 잇는 ‘열린책들’의 ‘경계소설’(slipstream) 선집의 세 번째 작품으로 발간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이런 평가의 바탕이 된 초기의 걸작 중단편들을 모은 제1작품집이다. 고독한 사내와 금성의 바다에 서식하는 거대한 어룡(魚龍) 사이의 사투를 묘사한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존재와 기억의 고통에 가득 찬 <폭풍의 이 순간>,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컴퓨터의 얘기를 다룬 <프로스트와 베타> 등 젊고 유려한 문체를 통해 시적·철학적인 감수성을 형상화한 스타일리시한 작풍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2002년 들어 여러 출판사가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 시리즈를 비롯한 추리소설의 고전을 앞다퉈 출간한 것은 이것들이 저작권 시효가 만료돼 따로 계약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에 어린 시절에 동화나 축약본으로 읽은 고전적 명작에 대한 386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른바 ‘노스탤지어’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SF도 예외가 아니어서, 최근 ‘열림원’에서 쥘 베른(1828~1905)의 대표작 <해저 2만리>와 <지구 속 여행>이 완역출간된 것이 눈길을 끈다.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해저 2만리>가 기본적으로는 단발 기획임에 비해, ‘열림원’에서는 작가 서거 100주년이 되는 2005년 5월까지 베른이 쓴 15종의 작품을 펴낼 야심적인 계획을 세웠다.

초기 걸작들 복간… 대체역사 분야 주목

영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시리즈는 국내 판타지 붐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최근 출간된 <반지의 제왕>의 참고 서적들.
근대 SF의 원형을 완성한 작가로는 문학에 최초로 근대과학적 플롯을 도입함으로써 추리소설과 SF 양쪽의 비조로 추앙받는 애드거 앨런 포와, ‘과학적 로맨스’를 양산한 쥘 베른, 그리고 과학적 사유를 통한 사고실험(speculation)을 지향한 H. G. 웰스가 있다. 베른의 경우, 어떨 때는 순진무구하기까지 한 ‘상상력’을 구사해 과학기술 특유의 ‘경이감’을 모험소설의 형태로 구현했다는 점을 들어 과학(기술)적인 정합성을 중시하는 하드 SF의 효시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베른이 쓴 대부분의 소설은 기본적으로는 세계가 아직 넓고, 미지에 차 있는 시절을 배경으로 쾌남아가 활약하는 대중적 과학모험담이라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참고로 추리소설뿐 아니라 SF와 역사소설 등을 여러 편 쓴 코난 도일은 문학적으로는 사상가 웰스와 인기작가 베른의 중간선상에 있다.

SF의 중요한 하위 장르의 하나이자, 서구에서는 이제 장르를 넘어선 소설기법의 하나로 정착된 대체역사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번역 소개되었다. 그레고리 키스의 <철학자의 돌>(황금가지, 2002)은 연금술이 실제적인 학문으로 기능하는 ‘또 하나의’ 18세기 유럽과 미국을 배경으로, 루이 14세와 아이작 뉴턴, 벤저민 프랭클린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활약하는 지적인 SF·판타지 모험담이다. SF에서 역사를 개변하는 행위, 특히 현대 과학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지적 혁명이 시작된 시기의 역사를 개변하는 행위는 장르 자체의 재해석과 직결되기 때문에, 이 분야에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그런 맥락에서 닐 스티븐슨의 SF 스릴러 <크립토노미콘>(책세상, 2002)도 대체역사물의 연장선상에 있다. 실질적인 데뷔작인 <스노우 크래쉬>(1992)로 명성을 얻은 스티븐슨은 사이버펑크 소설의 계보를 잇는 SF 작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최근작인 <크립토노미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시 암호전쟁과 현대의 정보전쟁이 착종하는 복잡한 플롯을 통해 현대인이 직면한 ‘정보’의 성질을 다중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새로운 작풍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규모 SF 총서, 독서층 사로잡을까

SF의 강세가 계속되는 한편, 판타지 고전과 관련된 주변 서적들의 출간도 잇따르고 있다. <지도로 보는 반지의 제왕>(황금가지, 2002)과 <톨킨 백과사전>(해나무, 2002)은 고전에 대한 보조 텍스트의 뜻이 있는 하나의 참고서적으로, 장르 팬층이 두꺼운 영미권에서는 일반화된 출판형태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해당작품의 팬들을 대상으로 한 국소적인 시도에 머무르고 있다. 국내 판타지붐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된 영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 시리즈 개봉이 내년에도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해외 판타지 번역출판은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환상문학 소개의 무게중심은 이미 번역할 만한 A급 고전을 대부분 소화해버린 판타지에서- 예외가 있다면, 영화로도 잘 알려진 <야만인 코난>(황금가지, 2003년 출간 예정) 정도다- SF쪽으로 옮겨갈 전망이다. 실제로 출판사 ‘행복한책읽기’에서는 2003년 봄을 목표로 고전·신고전(新古典) 및 현대 작품을 망라하는 대규모 SF 총서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으며, 다른 몇몇 출판사에서는 P. K. 딕이나 커트 보니것 등의 대표적인 20세기 SF 작가의 번역출간이 진행되고 있다는 고무적인 소식도 들린다.

강수백/ SF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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