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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청춘의 쓴맛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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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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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을 달콤하게 버무린 청춘영화들… 발랄함 이면에 있는 치열한 고뇌도 보고 싶다

생각해보니 한국에도 청춘영화가 있었다. 지금 보기에는 어색하지만 신성일이 출연한 <맨발의 청춘> 등도 청춘영화였고, 70년대에는 <진짜 진짜 좋아해> 시리즈와 <고교얄개> 시리즈 등이 있었다. 이미연의 출세작도 청춘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다. 그러다가 한동안 청춘영화들이 모습을 감추었다. 아니 10대가 볼 수 있는 영화 자체가 확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올해 갑자기 10대가 주인공인 영화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몽정기> 그리고 <품행제로>까지. 두 작품은 이미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품행제로>의 시사회 반응도 좋은 편이다. 만듦새라는 면에서 <품행제로>는 올해 나온 청춘영화들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해적, …> <몽정기> 그리고 <품행제로>

공교롭게도 세 영화의 배경은 모두 80년대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80년대의 달동네에서 벌어지는 청춘과 사랑 이야기고, <몽정기>는 성에 눈뜨는 중학생들의 성적 모험을 담은 한국판 <아메리칸 파이>라고 할 수 있다. <품행제로>는 성보다, 불량학생과 모범적인 여고생의 풋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세편 모두의 공통점은 80년대의 풍물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과시한다는 점이다. 디스코, 포르노잡지와 비디오, 롤러장, 나이키 등 80년대의 10대들이 열광했던 장소와 사물들에 얽힌 사건이 연속으로 웃음을 유발하고 때로는 사건을 끌어가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80년대라는 과거는 청춘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배어 있는 향수의 근원인 동시에, 현실의 엄혹함을 날려버리는 장치가 된다. 이 청춘영화들은 모두 코미디다. 그리고 결말은 한결같이 농담 아니면 사랑이다. 청춘영화들은 청춘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청춘에겐 두개의 얼굴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억압한다. 가정, 학교, 사회. 누구도 나를 받아주지 않고,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거친 세상에 내버려진 이방인이다. 반면 청춘은 맑고, 투명하고, 모든 것이 열려 있는 때다. 무엇인가에 온몸으로 부딪쳐도 여간해서 치명상을 입지 않는, 생의 활력으로 가득한 시절. 푸른 청춘을 담아내는 청춘영화는, 그래서 가벼우면서도 무겁다. 80년대 ‘청춘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린 존 휴스 감독의 영화가 그랬다. <브렉퍼스트 클럽> <16개의 촛불> 등은 성장의 고통과 희열에 들떠 있는 10대의 초상을 그려낸다. 존 휴스의 영화가 80년대의 10대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것은, 그들의 일상과 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과 소망이 단지 춤과 노래, 섹스와 드라이브만으로 보인다 해도, 그들에게는 한없이 절실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었고, 그들은 청춘영화에서 자신과 같은 10대를 만나고 싶었다. 세상 어딘가에 나와 비슷한 고민과 고통을 지닌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해적, 디스코왕 되다> <몽정기> <품행제로>는 10대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추억과 향수의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몽정기>는 유치하다. 너무나 유치하고 단순해서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중학교 3학년인 동현과 친구들의 대화는 오로지 ‘섹스’다. 여성의 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자위는 몇번이나 할 수 있을까 등등. 그건 <아메리칸 파이>의 고등학생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비비스와 벗헤드>의 최대의 소망도 여자와 한번 ‘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섹스는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 소중하고, 어떤 체험보다 황홀한 것이다.

10대의 초상 없는 추억·향수의 판타지

그런데 묘한 것이 있다. <몽정기>의 아이들은 10대의 여학생을 찾지 않는다. 그건 <품행제로>의 중필도 마찬가지다. 섹스에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춘화사업까지 하는 중필은 대단히 플라토닉한 사랑을 한다. <아메리칸 파이>의 아이들처럼 어떻게 섹스 한번 할까 하며 기회를 노리지도 않는다. 그냥 ‘사랑’만 나눈다. 왜 <몽정기>와 <품행제로>의 아이들은, 섹스와 사랑을 분리하는 것일까. 섹스를 먼저 하다가 순수한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순수한 사랑이 섹스 때문에 교착상태에 빠지는 일은 왜 없을까. 가장 현실에 가까운 것은 사랑과 섹스의 혼돈 아닐까 등급 때문에 10대의 섹스를 그릴 수 없었던 게 아닌가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올해의 청춘영화들이 일제히 배경으로 80년대를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피일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 영화들은 과거를 회고하며 재해석하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80년대의 유치하고 반짝거리는 대중문화의 풍경을 판타지의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데 있다. 80년대는 30, 40대에게 추억과 향수의 공간이지만 21세기의 10대에게는 전혀 낯선 신세계인 것이다. 신세계에서는 달동네조차 그냥 유희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똥푸는 일도 웃음거리고, 10대의 패싸움은 무협지 혹은 애니메이션의 활극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80년대가 꼭 그렇게 가볍기만 한 시대는 아니었다. <아이스 스톰>의 70년대가 60년대 세계를 휩쓴 민권운동의 패배에 따른 공허함을 이기기 위해 타락에 헌신한 때라면, 80년대는 패배의 기억이 사라지고 아니 고의로 기억 저편에 밀어넣고 가벼움에 취했던 시기다. 즐거웠던 80년대의 영화들을, <블루스 브러더스>나 <전선 위의 참새>나 <페리스의 휴일>을 보면 묘한 쓸쓸함이 배어난다. 그때는 시대의 공기에 취해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느낄 수 있는 아련하게 슬픈 느낌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영화들의 일방적인 시선이 그나마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들이 한결같이 순진하다는 점이다. 내숭이 없으니까 부담도 없다고나 할까 <몽정기>의 정초신 감독은 “아름답게 기억되는 젊은 시절의 추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랑이나 섹스에 목숨을 건다. 단지 그것만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다. 만약 <몽정기>나 <품행제로>에 사랑과 섹스 이외의 다른 무엇이 끼어들었다면 이 영화들은 파행의 길을 달렸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들은 올곧게 자신의 길만을 간다. 오락영화로서의 자기 목적을 충실하게 지킨다.

그들의 비명과 한숨도 들려주오

<몽정기>나 <품행제로>가 문제 있다는 것은 아니다. <몽정기>와 <품행제로>는 자신이 할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유쾌, 발랄하고 달콤하다. 그들의 섹스에 대한 관심은 세상 모든 근심과 슬픔을 덮어버릴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10대가 겪어야 하는 사춘기는 단지 통과의례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할 치열한 전장이기도 하다. 한국의 청춘영화에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10대의 ‘비명과 한숨 그리고 입맞춤’이 필요하다. <몽정기>와 <품행제로>도 아주 즐거웠고 좋았지만, 앞으로 보고 싶은 것은 빛의 이면에 있는 ‘어두운’ 청춘영화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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