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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계란 맞은 사람인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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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2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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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투표를 몇 시간 앞둔 정몽준 대표의 폭탄발언으로 놀란 맘을 추스르지 못해 이곳저곳 사이트를 드나들며 애타하는 내게 어머니는 불쑥 맥주 한병을 내민다.

새벽 1시가 넘어가는데도 평소 눈에 감기던 잠기운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어째 울떡증 걸린 것 맹키로 가슴이 뛰어 잠도 안 오고 짠해 죽겄어야…. 니도 속상할 텐께 한잔 혀라!”

새벽녘 완도까지 조문 가셔야 하는 아버님만 태우고 날도 새지 않아 도착한 투표장에는 이미 근동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함이 오간다.

잠에 못 이겨 투표를 미루고 들어선 내게 오후에 떼(잔디)밭에 일가기로 했으니 빨리 투표하러 가자며 어머니 군산댁은 늦잠을 거두어버린다.

군산댁 태우고 마을 어귀에 나가니 매산양반이 시린 귀를 붉히며 군내버스를 기다린다.

“투표하러 가씨요 타게라우. 매산댁은 워찌 안 보인다요” 주민등록증 찾는다고 늦게 나온 모양이라는 이야기를 한 순간 매산댁이 마을회관 앞으로 걸어나온다. 한표라도 서두르게 매산댁 태우자는 군산댁의 제안에 차는 다시 동네로 들어가보지만 매산댁의 행방은 오리무중…. 아쉬운 대로 동네 어르신 세분이 합류하고 5표를 싣고 투표장으로 향한다.

사무실에 일이 있어 다시 나가려는 나와 차를 세우고 어머니는 청암양반네 두 노인이 차가 없어 투표하러 안 간다고 뻗대니 청암양반네로 가잔다.


“그 사람 고생한 것 보면 이렇게라도 해야 맘이 편하다”며 평소 얌전하기로 소문난 군산댁은 한표 살리기 위해 잰 걸음을 놓는다.

한참을 기다려 나온 청암댁이 주소가 광주에 있는 아들 앞으로 옮겨져 있어 당신은 안 된다고 해도 군산댁은 그래도 가서 사정해보라며 억지소리로 안타까움을 달랜다.

발품에도 불구하고 나는 빈차가 되고 군산댁은 아쉬움에 빈손을 턴다.

여느 때 같으며 떼밭일 갔다오는 날엔 일찌감치 눕게 마련인데 손에 땀을 쥐고 아이들까지 둘러앉아 개표방송에 열을 올린다. 접전, 뒤집어지고, 또다시 뒤집히고….

“얼매나 고상혔냐 긍게 되어야 될 텐데”, “나눠먹기라고 혀쌓드만 잘된 것 아니다냐”, “서울 옮겨가야 작은아들도 헐한(싼) 값에 집 살 텐데”, “서울은 숨이 막혀 하루도 못 있겠더라”며 동정론에서 단일화 문제, 수도 이전까지 언제 관심이 많았나 싶게 높은 정치의식을 보인다. 동네사람들도 이 정도는 다 안다면서….

당선이 확실시되고도 이어지는 프로그램에 눈을 떼지 못하고 내 자식 일인 양 이불 뒤집어쓰고 아직도 거실에 앉아 계신다. 이제 편히 보시라고 해도 꼿꼿한 자세로 새 대통령을 주목하고 있다.

“쩌 양반이 농민대회서 계란 맞은 사람인께 알아서 할 테제”

군산댁의 한표는 농심이고 민심이었지 싶다. 이런 맘들이 지역감정으로 오물세례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다.

“군산댁 이제 그만 주무셔요. 내일도 떼밭일 가신다면서요.”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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