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궁궐 덕수궁을 상징하는 문화재 건물… 시울시의 보존안 파기로 또다시 버림받을 위기
비운의 궁궐 덕수궁은 몇번 울어야 하는가. 옛 덕수궁 터에 있던 문화재 건물 중명전(重明殿) 보존을 둘러싸고 서울시의 모순적 태도가 혼란을 빚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10월 중명전 건물을 보존하려는 차원에서 시의회에 ‘시유재산관리계획변경안’을 냈다. 시의회는 이에 ‘중명전은 역사적 현장으로 보존 필요성이 높아 시의 매입 결정에 공감한다. 문화재 가치를 높이고 정동 일대를 문화벨트로 조성하는 데 시가 노력해야 한다’며 시의 안을 의결해주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11월 초 이 안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백지화해버렸다. 이유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시설로 바꿀 경우 매입비 50억원 외에 건물 수리 및 리모델링 비용 52억원이 별도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기안해 의회에 상정, 의결한 내용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이에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인 정한개발은 11월20일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 해제’를 요구하며, “그동안 들어간 비용 일체를 보상하라”는 민원을 냈다.
왜 이 지경까지 왔는가. 건물은 버려진 채 상처투성이가 돼가는데 서울시는 아직도 필요 없는 일이라고 버티고만 있다. 지금 서울에 일제 만행을 알리는 현장이 무엇이 남아 있기에 뒷걸음만 치는지 알 수 없다.
중명전의 별칭인 수옥헌(漱玉軒)은 경운궁의 서문 평성문 밖 중명전을 비롯해 전당 10채를 총칭하는 또 하나의 궁궐 구역을 일컫는다. 중명전은 수옥헌 구역의 핵심인데 지금은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다.
역사적 보존 가치 무시한 비용 타령
원래 수옥헌 구역 대부분의 땅은 양반가의 집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1890년 전후부터는 미국 장로교회와 관련한 건물이 들어섰다. 수옥헌 지역 주변은 미국·러시아·프랑스 등 서양 열강들의 공사관과 주거시설 그리고 종교시설 등이 포진하고 있어 외세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고종 임금은 1896년 즈음부터 경운궁 안팎 국유지에 많은 궁궐 건축물과 서양식 건물(이양관)을 섞어서 세우기 시작했다. 수옥헌 구역은 이때 조성된 것으로 중명전·만희당·흠문각·장기당·양복당·경효전·수풍당·정이당·강태실·환벽정 등으로 이뤄졌다. 이 중 만희당은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환벽정은 헤론(J. Heron), 흠문각은 모펫(S. A. Moffett)의 집이었던 자리에 지어진 것이다. 이때 함께 들어선 서양식 건축물들은 궁궐 안엔 돈덕전·정관헌·구성헌, 궁궐 밖엔 중명전·환벽정 모두 다섯채였다.
1896년 세워진 중명전은 현재 미국대사관 관저 쪽문과 울타리를 함께하고 있다. 중명전은 수옥헌 중 가장 중요한 건물로, 그 이름은 ‘무거운 빛의 전‘이란 뜻이다. 고종이 궁궐의 도서관(King’s Library)으로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 건물이다. 중명전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Afanasij Ivanobich Scredin Sabatin)이 세운 것으로 지상 2층 지하 1층의 벽돌조 서양식 건물이었다. 연면적 237.30평으로 727.08평의 터에 세워졌다. 고종 황제는 1904년 4월14일 경운궁에 불이 나자 중명전으로 피신했다. 이때부터 중명전은 고종 황제가 외국인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장이 되었다.
일제에 무릎 꿇은 치욕의 장소
1905년 11월17일 오후 3시 중명전에서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일제의 대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나타났다. 우리 5적 대신도 한자리에 앉았다. 18일 새벽 1시께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것이다. 중명전은 이 치욕의 장소가 되었다. 1907년 7월19일엔 고종 황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양위당하고 수옥헌에서 생활한다. 순종은 황세자 때부터 1907년 임금이 될 때까지 중명전에서 살았다.
순종은 8월27일 돈덕전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돈덕전은 고종 황제가 외국 사신을 알현하는 장소로 지어졌는데 붉은 벽돌 건물에 양철지붕을 덮고 있었다. 석조전 뒤편, 현재의 미국대사관 관저와 덕수궁 후문 주차장에 걸쳐 있던 것으로 1910년 헐렸다. 이 자리가 지금 덕수궁 돌담길의 정점(頂点)이다. 순종이 즉위하면서 경운궁의 이름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순종은 이 해 11월13일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덕수궁에는 고종이 실권 없는 태황제가 되어 남았다. 창덕궁이 정궁이 된 것이고 덕수궁은 별궁으로 전락한 것이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이 함녕전에서 승하함으로써 덕수궁과 왕실의 관계는 끝났다. 더 이상 궁궐 짓는 일도 끝났다.
중명전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긴 뒤인 1915년부터는 정동구락부(클럽)로 사용되었다. 중명전은 1925년 3월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과 속 복도만 남기고 내부는 대부분 타버렸다. 그 뒤 재건되어 외국인구락부(外國人俱樂部)로 쓰였고, 해방 뒤에는 서울 클럽(Seoul Club)으로 사용되었다. 주한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주 이용객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1977년부터다. 중명전이 이 해 4월 사기업인 정한개발에 매각되었기 때문이다. 중명전은 1983년 11월11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으나 건물은 계속 임대 사무실과 주차장으로 쓰인 것이다. 2000년 9월 소유주는 문화재 지정 해제 요청을 서울시에 내기도 했고 상기 토지 매입, 대토를 요청했다. 소유주는 2002년 5월 부동산 감정평가를 했는데 평가액은 43억6천여만원이었다.
정동 일대를 역사벨트로 조성해야
지금 중명전은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미국대사관쪽도 자신의 관저 바로 눈앞에 있는 이 건물의 조락현상을 보며 우리 정부의 문화재 관리실태를 비웃고 있다. 존재하는 건축물도 관리하지 못하면서 사라진 건축물을 왜 자꾸 거들먹거리느냐는 것이다.
이제라도 늦었지만 서울시는 경희궁의 서울역사박물관, 그리고 서소문동의 시립미술관(옛 대법원)과 중명전 입구에 있는 정동극장과 연결하여 새로운 문화의 띠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수옥헌 지역을 복원하는 것과 중명전을 수리 보존하는 일은 정동 일대 재편성과 덕수궁 궁역 확장 그리고 미국대사관 터 활용 계획과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문화재 전문위원

사진/ 1954년 외국인구락부로쓰일 때 중명전 전경. (자료: 이철원)

사진/ 1904년 4월14일 밤불이 나자 고종이 탄 가마가 덕수궁 서쪽문 평성문을 통해 탈출하고 있다. (자료:이종학<전시화보>(戰時畵報)에서)

사진/ 수옥헌 지역 중앙에 중명전이 있다. 덕수궁쪽으로 나 있는 문이 평성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