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주적으로 삼은 <007 어나더데이>…한반도에 대한 몰이해 화면 곳곳에 드러나
007 시리즈의 타이틀 장면들은 늘 ‘섹시했다’. 나체의 여성들이 화면 곳곳에서 튀어나와 눈을 어지럽히는 수준은 단순한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다. 비록 그림자로 처리한 나체지만 제임스 본드의 거대한 총을 놓고 농도 짙은 장난질을 벌이거나(총이 남성 성기를 상징한다는 건 오래된 이야기다), 군모만 쓴 나신으로 레닌 동상을 깨뜨리는 장면 등은 007 영화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암시해왔다. 그런데 <007 어나더데이>(12월31일 개봉)의 타이틀에는 나체의 여성 대신 섬뜩한 전갈이, 말쑥한 외모 대신 멋대로 자란 장발과 덥수룩한 수염으로 뒤덮여 고통스러워하는 제임스 본드가 등장한다. 여자가 등장하긴 한다. 독기를 내뿜는 북한의 여군이 본드를 고문한다. 007 시리즈의 섹슈얼리티가 갑자기 사디즘으로 돌변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기밀매·지뢰밭·고문 등에 뒤범벅
형식적으로는 오프닝 신과 아귀가 맞는다. (하와이에서 찍은) 엄청나게 큰 파도를 타고 북한에 멋지게 잠입한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는 문 대령과 위장거래를 시작한다. 북한 내 온건파 군부를 대변하는 듯한 아버지와 달리 문 대령(윌 윤 리)은 사악함과 타락의 전형이다. 무기 밀거래로 다이아몬드를 모으는 인물로 자신만큼 냉혹한 악당 자오(릭 윤)를 심복으로 두고 있다. 거래가 끝나갈 무렵 조직 내 누군가의 배신으로 정체가 탄로난 본드는 한바탕 액션을 펼치며 부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끝내 체포된 본드가 이후 14개월 동안 북한군으로부터 받는 모진 고문들이 타이틀 장면을 채운다.
무기밀매·지뢰밭·고문 등과 같은 단어는 자의건 타의건 한반도를 특징지을 법한 것들이다. 그 ‘사실성’에 기초한 <007 어나더데이>의 초반 장면은 북한을 확실한 ‘악의 축’으로 만들어버린다. 한달 전 미국에서 개봉해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을 제치고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를 만큼 이 영화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은 ‘우리의 007’을 밑바닥까지 추락시킨 적성국가에 관대해야 할 하등의 이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14개월의 모진 고문을 견디고 스파이 맞교환으로 풀려난 본드에게 직속상관 M(주디 덴치)마저 차갑게 외면하는 처지가 아닌가. “북한에 심어둔 첩보원이 제거됐어. 다 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빼낸 거야. 당신은 이제 쓸모없어. 살인면허를 반납해.”
이를 악물고 재기하려는 007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내부의 배신자와 북한군 자오를 처치하려고 홍콩으로, 쿠바로, 아이슬란드로 달려간다. 또다시 북한이 문제다. DNA 조작으로 외모를 서구인으로 바꾼 문 대령은 태양열을 이용한 가공할 위성무기 ‘이카루스’를 만들어 ‘조선통일’을 도모한다. 100만 대군을 남한에 투입하기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이카루스의 광선총은 비무장지대를 글자 그대로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한다. 대체 이카루스를 만들 정도의 기술과 자본이 어디서 나왔는지, 왜 곧바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는지는 굳이 묻지 말자.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007’은 문 대령의 야심이나 비무장지대의 지하 벙커에 모인 M과 미 중앙정보국(CIA) 간부들의 안위(북한군에 대적하는 건 한국군이 아니라 연합군처럼 꾸린 미군이라는 놀라운 사실성!)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복수를 위한 제거 의지와 생존 본능이 있을 뿐이다.
이젠 007이 고히 잠들 때가 됐는지…
시리즈 1탄이 나온 이래 40년이 흘러 20번째로 만든 기념비적 <007 어나더데이>에는 2천억원에 가까운 거대한 돈이 들어갔다. 그만큼 화면의 스펙터클은 볼 만하고 정교하다. 아름답고 드넓은 빙판 위에서 로켓탄을 날리며 차량 추격신을 벌이는 장면에선 넋을 빼앗길 만하다. 그러나 철조망 건너 불바다를 뒤로 한 채 애처롭게 달아나는 한국군 병사들의 모습까지 즐기며 볼 수 있을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배경으로 삼은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한반도는 냉전이 끝난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아닌가”라고 한 피어스 브로스넌이나 “100만명의 젊은이들이 날마다 서로 총을 맞대고 있는 한국은 <007 어나더데이>를 찍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였다. 우리는 지뢰가 널려 있고 암시장에서 무기를 거래하는 나라가 필요했고, 북한은 실제로 그런 곳이다”라고 한 리 타마호리 감독의 말은 이곳을 바라보는 외부의 눈길이 어떠한지 잘 알려준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한반도 분단 상황을 배경으로한 는 북한을 확실한 '악의 축'으로 만들어버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