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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10만년어치 감옥살이를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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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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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촛불시위 거리에서 느끼는 감격… 청소년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논술공부는 없으리라

사진/ 유신 때 같았으면 아스팔트 밟은 죄로 1년 이상 콩밥을 먹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10만명이 모였다. (박승화 기자)
시청앞 아스팔트를 꼭 15년 만에 밟았다. 1987년 7월, 한열이 장례식 때 지난 토요일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웠을 때, 그 대열에 끼어 한여름의 열기를 훅훅 뿜어내던 아스팔트를 밟아보고 꼭 15년 만의 일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 군사독재정권은 정권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군사독재에 항거해 투신·분신한 분들의 시신을 빼앗아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열이의 시신도 그렇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수만명의 청년학생들이 신촌 세브란스병원 부근에서 이틀씩, 사흘씩 밤을 지새웠다. 오죽하면 아침에 영결식을 하는 숙연한 자리에서 깜빡깜빡 조는 젊은이들이 많았을까 100만 인파가 태평로 앞까지 갔다가 저들의 페퍼포그 세례 한번에 개미새끼 흩어지듯 흩어져버렸다. 1980년대 내내, 그리고 6월항쟁의 한달간 최루가스에 단련될 대로 단련됐지만 며칠 밤을 지새운 지친 몸은 페퍼포그 한방에 무너져버렸다. 무교동 골목으로 도망쳤다가 기운을 추스르고, 혹시 다시 모이지 않을까 나와 본 태평로에는 주인 잃은 신발짝만 가득했다.

광화문, 민족자주의 기념관이 될 자리


광화문의 아스팔트를 22년 만에 밟아보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대학생들은 가두진출을 놓고 오랜 논쟁을 벌이다 마침내 시내로 나아갔다. 5월15일의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기 전날인 5월14일 밤,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광화문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1978년 6월26일 광화문에서 서울시내 대학생들이 연합시위를 했는데, 이때는 아스팔트를 밟았다가 연행된 학생들 20여명이 1년 내지 2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 아마 이 데모는 1964년 ‘6·3사태’ 이후 처음으로 광화문에 진출한 것이었을 텐데, 아스팔트 밟은 죄로 1년 이상 콩밥을 먹어야 했으니 광화문은 그렇게 엄청난 곳이었다. 그곳에 10만 가까운 인파가 모여 반미를 외쳤다.

유신시대를 기준으로 하면 시민들은 10만년어치 감옥살이를 번 셈이다. 그날 그자리에서는 반미를 외친다고 더 이상 안기부의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당할 걱정은 없었으니 세상 많이 달라졌다. 세상이 좀더 달라져 행정수도가 건설되고 미 대사관이 옮겨간다면, 저 자리는 민족자주의 기념관이 돼야 하고, 두 아이를 비롯해 미군의 범죄에 의해 희생된 모든 이를 기리는 추모 공간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세대별로 표의 향방이 확 갈리는 것처럼, 미국을 대하는 태도에도 세대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좀 거칠게 이야기해보면 70대 이상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세대들은 미국과 싸워본 경험 때문일까, 미국이 꼭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50대 후반과 60대는 미국에 대해 아주 심한 열패감을 느끼는 세대다. 미군을 좇아다니며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과 껌을 얻어먹고, 문전옥답에 미군기지가 들어서고, 동네의 예쁘지만 가난한 집 언니·누나들이 하나씩 양공주가 되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가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미군이 군홧발을 쳐들면, 그것이 항공모함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세대에 인기가 있는 <애모>의 노랫말처럼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를 외울 수밖에 없는 역사적 경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5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까지의 세대들은 미국의 원조물자로 만든 옥수수빵을 학교에서 급식으로 먹고 자란 세대다. 윗대와는 달리 미군의 못된 짓을 직접 볼 기회가 적었으며 학교에서는 미국을 고마운 은인의 나라로 가르쳤고, 언론은 미군의 범죄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40대 초반에서 30대까지는 그래도 대학을 다니며 반미의 세례를 받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미국이 꼭 고마운 나라가 아니라는 점은 잘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자기 몸을 불사르며 ‘가열찬’ 반미투쟁을 벌이는 투쟁대열에 선뜻 몸을 내던지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이들은 군사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한 이른바 386세대지만, 한편으로는 군사독재자들이 정한 규율에 의해 누구보다 철저히 교육받았기에 아직도 규율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반면 10대와 20대는 상대적으로 미국으로부터도, 군사독재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다. 미국에 대해 고마움을 느낄 것도 없고, 미국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낄 까닭도 없다. 그들은 당당하다.

반미의 ‘반’ 자만 나와도 기겁을 하던 어떤 정당의 대통령 후보는 앞장서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과 부시의 직접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서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고는 신부님들이 삭발까지 하고 단식하는 농성장에 나아가 연대감을 표시했다. 그 자리에서 신부님들은 그 후보 일행에게 떠나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보통사람이라면 바늘방석 같은 그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서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들에게 떠나라고 한 신부님들 속이 좁았다고 비판하지만, 나는 신부님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월드컵 열기 속에 두 아이가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은 뒤 ‘여중생 사망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의 관계자들이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대책 마련을 호소하기 위해 그 정당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문전박대를 받았다. 그날 방문단에 포함된 신부님들이, 머리를 깎고 단식농성하고 있는 그 신부님들이었다.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

사진/ '바로 그 자리.' 87년 6월 이한열군의 서울 시청앞 장례식(왼쪽) 인파와 60년 4월 이승만 정권에 분노를 터뜨리는 시민들.(한겨레)
며칠 뒤에는 그 정당의 대표라는 자가 지금의 반미 흐름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고 해 사람들의 속을 다시 한번 뒤집어놓았다. 12월14일 시청앞 집회에서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한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청년은 ‘여러분의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만지면 보이지 않는 손, 바로 여러분의 양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일침을 놓았지만, 나는 선후배 동료들이 숱하게 거쳐간 70~80년대 공안기관의 어두컴컴한 조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는데, 더러는 숨기고 감춰야 할 사실을 지키느라 힘겨운 싸움을 벌였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털어놓았는데도 고문이 그치지 않았다며 기막혀 했다.

정말 그랬다. 공안기관원들이야 상부의 지시가 있어 움직이고, 또 그런 일을 하면 돈이 나오고 진급도 하고 상도 받는데,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상 받는 것도 아니고 뻔히 감옥갈 일을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했다는 말을 그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니 없는 배후를 만들어내야 했고, 광주시민의 항쟁은 고정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야 자신과 상급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였다. 양심이라는 것을, 자발성이라는 것을,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12월14일 촛불시위에서 두드러진 점은 반미에 대한 일체감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일주일 전 시위에서만도 반미는 조금은 두려운 구호인 것 같았다. 여중생 사망 사건 이후 인터넷에서는 일부 네티즌들이 우리는 ‘반미’가 아니라 ‘미국 반대’나 ‘안티 유에스에이’이라고 주장했다. 논리적으로 반미와 미국 반대가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네티즌들은 운동권의 반미와 자신들의 분노를 애써 구분하고자 했다. 수구세력에 의해 빨갛게 덧칠해져서만이 아니다. 과거 ‘운동권’은 일반시민에게 ‘참을 수 없는 반미의 엄숙함’을 요구했다. 온몸에 신나를 붓고 산화한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후예들은 ‘민족의 허리가 두동강난 아픔’을 외면하면서, 윤금이씨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 없이 참혹하게 살해된 사실은 외면하면서, 그까짓 금메달 하나 빼앗겼다고 난리치는 ‘참을 수 없는 반미의 가벼움’을 견딜 수 없었다.

성조기를 처음 태운 강원대생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형 성조기를 시청앞 집회에서 당당히 찢어버렸다. 과거에도 미군부대에 기습적으로 들어가 시위를 벌인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미군이 자신들을 향해 총을 쏠지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서 미군부대의 담을 넘었다. 그러나 최근 미군부대 철조망을 끊고 들어가 시위를 한 학생들은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됐다. 윤금이씨 살해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미국에 있어서 잘 몰랐는데, 귀국해서 어떤 글을 보니 일부 학생들이 추모행사를 하며 윤금이씨를 ‘민족의 순결한 딸’이라 부른 모양이었다. 꼭 그렇게 불러야 미군의 악랄함이 드러나는 것일까 미군을 상대로 매매춘을 업으로 삼는 ‘양색시’를 우리는 경멸하고 ‘우리’라는 범주에 끼워주지 않았다. 그를 꼭 순결한 딸로 치장해야만 미군 범죄를 고발할 수 있는 것일까 학생들은 그렇게 해야 ‘양키’들의 범죄에 귀기울이지 않는 시민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반미운동은 오히려 일반시민과 반미운동가들 사이의 벽을 더욱 높게 했다.

75년 신일고생들의 유신반대, 그뒤…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섰다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 사건이다. 어른들이 보기에 너무나 어려보이는, 그리고 살인적 입시제도 때문에 어린 상태에 있도록 강요받아온 청소년들이지만, 이번 일을 보니 놀라울 정도로 속이 꽉 여물었다. 일제강점기의 동맹휴학이나, 광주학생운동을 우리 교과서는 민족독립운동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 시절 불의에 항거해 중고생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면 당장 퇴학감이었다. 4·19에서 대학생들이 주역이었다지만, 중고생들의 역할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 기억을 간직한 군사독재정권은 고등학생들이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나이가 든 대학생들은 경찰이 투입되어 진압을 하면 도망을 가지만, 물불 안 가리는 고등학생들은 무섭다는 것이다. 아마도 1975년 4월 신일고등학교생들이 유신반대 유인물을 뿌려 9명이 구류를 산 것을 마지막으로 고등학생들의 사회참여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후 고교 평준화가 단행되면서 그래도 일찍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에 눈뜬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명문고등학교가 사라지고, 중고등학교 입시에 분산된 입시 압력이 대학교 시험에 몰리게 됐다. 또 학도호국단 설치와 교련교육 강화 등 군사정권의 학교통제가 강화되면서 고등학생들이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게 됐다. 오랜 침묵을 깨고 청소년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발언을 한 것은 1989년 전교조가 만들어질 때다. 그런데 이 당시는 고등학생들이 특별한 정치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달프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학교생활에서 자기들 처지를 더 잘 이해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선생님들,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예뻐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절대 다수가 전교조에 들었고, 그래서 학교를 떠나야 했으니 아이들 눈에서도 피눈물이 났을 수밖에.

로드니 킹 사건과 비교해보라

미국에 사는 제 또래 아이들이 자기네 말로 꿈꾸고 미래를 설계할 때,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하는 우리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거리에 나가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하는 학부모님들이 혹시 계시다면 한말씀 드리고 싶다. 이보다 더 좋은 논술공부는 없으니 안심하시라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체험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토론하는 것보다 좋은 논술공부는 없다고. 7일의 촛불시위에서 한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아무도 자기들에게 미국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고, 근현대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참으로 가슴 아프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촛불시위 첫날, 아이들은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자기 발로 역사의 현장에 나와 스스로 집회 방식을 정하고, 질서를 잡아가고, 다른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경계하며 집회 목표를 분명히 하는 모습은 바로 민주정치의 참모습이었다. 무엇이 두려워 투표권을 스무살에 묶어두어야 하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7년에는 촛불시위의 주역인 청소년들이 대부분 유권자가 된다는 점이다. 이들이 경험한 민주주의는 민족자주의 발판이 된다.

정부나 보수언론들은 시민들의 움직임이 반미로 흘러서는 안 된다면서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성숙하고 신중하며, 이성적 대응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청소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다.

미국의 경우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지자, 로스앤젤레스 지역 유색인종들은 격분해 50여명이 목숨을 잃는 유혈폭동을 일으켰다. 로드니 킹은 경찰들에 의해 떡이 되도록 맞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중생 두명이 참혹하게 죽었음에도 너무나 평화적이고 차분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미국의 폭거에 대항해 이슬람 세계는 비행기를 납치해 무역센터와 국방성으로 돌진했지만, 우리는 평화의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반미 감정이 고조되면서 미군이나 미국인에 대한 테러가 자행됐지만, 우리는 자기 머리를 깎는 삭발이나 자기 밥을 굶는 단식으로 미국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보다 어떻게 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오히려 호들갑떠는 것은 그런 말을 해대는 보수언론과 정부 관계자들이다. 법무부 장관이라는 자는 미국에 지레 겁먹고 “SOFA 개정은 안 된다”라고 말한다. 미국과 교섭도 해보기도 전에 교섭의 주무장관인 외교통상부 장관을 제쳐놓고 그런 말을 하는 짓은 경솔하다 못 해 경망스럽기까지 하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사법제도와 법문화를 몰라서 우리가 미국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어불성설이다. 로드니 킹을 구타한 경찰관들이 무죄평결을 받았을 때 상식이 있는 미국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미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무지 때문은 아니다. SOFA의 조문이 나토국가들이 맺은 조문보다 손색이 없다는 말도 현실을 무시한 말이다. 두 아이가 목숨을 잃기 며칠 전 미군의 고압선에 감전된 전동록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를 죽게 한 고압선은 여전히 피복조차 입히지 않은 채 민가 위를 지나고 있다.

군산 기지에서는 오수가 하루 3천t씩 방류되고 있고, 용산을 비롯한 많은 곳에선 기름이 새어 토양을 오염시키고 있으며, 매향리에서는 폭격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우리 아이들이 미군의 궤도차량에 깔려 죽는 일이 내일이라도 또 일어난다면, 사고를 낸 미군들은 미군 검사에 의해 미군 법정에 기소되고 미군 배심원들이 평결하고, 미군 변호사가 변호하고, 미군 판사가 심판하고, 무죄로 석방돼 다음날 출국해버리면 그만이다. 이것이 SOFA의 현실인데 운영개선이 무슨 소용인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그저 전화로 유감스럽다는 한마디 듣자고 시민들이 모인 게 아니다. 부시가 “한국민을 존경한다”는 립서비스를 했을 때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 것은 우리 속이 좁아서일까

우리의 분노엔 국경이 없다

미국은 SOFA 개정에 쉽게 응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어떤 나라와도 공무 중의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주재국에 넘긴 예가 없다. 그래서 정부는 지레 겁부터 먹고 있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자.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어떤 국가도 자국민에 대한 치외법권을 순순히 포기한 적이 없는 사실을.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민간인에 대한 치외법권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미국과 맺은 SOFA는 해당범위가 너무 넓어 미군뿐 아니라 그 가족, 친척, 그리고 미군과 계약을 맺은 미국인까지 포함하고 있다. 20세기 불평등 시대에 미군에 대한 사실상의 치외법권이 인정됐다면, 이제 21세기에는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지 못한다는 법이 없고, 공무 중을 포함한 미군의 모든 범죄를 강력히 규제하는 새로운 협정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10년 전 또는 100년 전 범죄행위를 현재 우리는 당당히 우리의 권리로 누리고 있지 않은가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가는 것이다.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온한 꿈을 이뤄가면서.

우리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한반도의 전쟁 위기를 완화하는 운동과정에서 해외의 벗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우리가 든 촛불이 효순이와 미선이의 넋만을 비추는 것은 아니다. 이라크에도, 아프카니스탄에도 수많은 효순이와 미선이가 있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민족자주가, 우리가 되찾고야 말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어찌 한반도의 남녘에만 국한될 것인가 미국의 오만은 국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도 국경이 없다. 미국의 오만에 상처받은 사람들, 우리는 모두 하나다. 촛불의 힘으로, 아무도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평화의 힘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고 있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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