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탄광마을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한 임길택 선생의 유고시집 <산골아이>
아직 인터넷과 컴퓨터게임은 몰라도 좋다. “여름이면 등이 까맣도록 개울에서 놀고 겨울 바람 속에서도 온통 놀 일들뿐”이니까. “아직 바다도 모르고 사람 많다는 서울에도 가본 적 없지만 어느 골에 메토끼가 많은지, 맑은 샘물은 어디서 솟는지” 훤하게 꿰고 있다. 시골서 살아도 주눅들기는커녕 쭉쭉 뻗은 옥수수 대궁처럼 마음도 몸도 성큼성큼 자라나는 아이들, 산골아이들. 그 어린이들과 평생을 함께하다 지난 97년 세상을 떠난 임길택(1952~97) 선생의 유고시집 <산골아이>(보리 펴냄)가 나왔다.
폐암과 싸우며 어린이에게 남긴 선물
임 선생은 스무해의 교사생활 동안 열네해를 자청하여 강원도 산골마을과 탄광마을에서 보냈다. 1980년부터 84년까지 사북 초등학교 아이들의 글과 그림을 엮어 책으로 펴내기도 한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거친 사북을 먼저 나서서 사랑했고, 누구도 존경하지 않았던 광부 아버지, 막노동이며 온갖 잡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를 먼저 나서서 존경한 선생님’이었다. 존경했던 권정생 선생처럼 그 역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옆에서 그 마음을 읽고 노래하며 살고자 했다. “길섶 소똥을 보면/ 그 소똥과 함께/ 풀숲에서 잠들고/ 가뭄에 타는 곡식들을 보고는/ 함께 목이 타고서야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분.”(‘권정생 선생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한명 한명의 마음을 살피는 태도는 마치 아이들 맘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시로 나타난다. 엄마가 감나무집 아줌마에게서 빌린 돈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자 사람이 없더라며 거짓말을 지어내고(‘거짓말’), 망가뜨린 필통값을 물어내라는 짝지의 말에 맘고생을 하며 길바닥에 떨어진 돈이 없나 살핀다(‘고민2’). 아버지와 대판 싸운 이웃집아저씨에게 괜시리 미안해 낼 아침 아저씨가 인사를 안받아줄까 걱정하고(‘싸움’)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어머니 앞에서 눈치를 보느라 할머니 얘기를 꺼내지도 못한다(‘싫다 했잖아요’). 깊은 산골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의 자잘한 하루 일과도 섬세하게 묘사된다. 해거름 지는 겨울 저녁 집에서 만든 두부를 양푼에 담아 이웃에 나눠주는데 그 위에 하얀 눈이 사르르 떨어지고(‘산골아이 3’), 설밑 엿굽는 날엔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고 코만 벌름거린다(엿굽는 날). 여름방학 내내 울보 동생을 돌봐야 하는 통에 꼼짝도 할 수 없어 속상해하고(‘영순이 여름방학 2’) 꽁꽁추위 겨울을 앞두고 가지런히 패놓은 장작더미를 보며 뿌듯해하기도 한다(‘장작가리’).
이 시집에 실린 77편은 97년 6월부터 12월까지 쓴 시들인데, 폐암과 힘겹게 싸우던 선생이 마지막엔 힘이 없어 스스로 펜을 잡지 못하자 아내가 선생의 말을 받아 적은 것도 여러 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죽음과 싸우는 힘겨움을 내비치는 건 시집 전체에 걸쳐 이 한편 정도에 불과하다.
“가고 싶은 데 걸어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 먹을 수 있는 일들/ 일하느라 손을 움직이고/ 무얼 찾아 책을 펴드는 일들/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몰라요/ 아무렇지 않지만/ 그런 일들이 기적 속에서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되는 날/ 세상이 달리 보이는 날”(‘산골아이 30- 몰라도 좋은 일’)
시와 함께 실린 사진들은 몇해 동안 오지마을 분교를 찾아다니며 이를 필름에 담아온 강재훈(<한겨레21> 사진팀장)씨의 작품이다.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두 사람의 글과 사진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자연 속에서 자라나는 곱고 어린 마음들을 담아낸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사진/ 임길택 선생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를 남겼다. 지난 12월8일 열린 임길택 선생 5주기 추모식에 제자와 지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강재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