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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빛과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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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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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빛은 참으로 경이로운 현상이다. “만약 세상에 빛이 없다면…”이란 생각만으로도 빛에 관한 수많은 상념들로 빠져들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빛은 우선 우주를 광명과 암흑의 두 세계로 나눈다는 강렬한 상징성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빛은 세계 각지의 신화나 전설 속에서 창조와 관련되는 대목에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이며 성경에서의 창조는 “빛이 있으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런저런 계기로 인류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도대체 빛이 뭐기에…”라는 의문으로 시작되는 기나긴 빛의 탐구에 관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 과학도 빛의 본질과 행동에 얽힌 수수께끼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여정은 앞으로도 오랜 세월 더 계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미완성인 빛의 탐구에서 가장 중요한 전기는 1905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해명이다. 그때까지 빛의 본질에 대해서는 뉴턴의 입자설과 호이겐스의 파동설이 200년이 넘도록 대립해왔다. 그런데 1870년대에 나온 유명한 ‘맥스웰 방정식’은 파동설쪽에 거의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광전효과는 파동설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부 금속들의 표면에 빛(광)을 비췄을 때 전자(전)가 방출되는 ‘효과’를 가리킨다. 영화를 볼 때 영상과 함께 나오는 음향은 이를 이용한다. 그러나 빛을 극히 작은 돌멩이와 같은 입자로 생각하면 아주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빛이라는 돌멩이를 던지면 전자라는 돌멩이가 튕겨나올 수 있으리라는 점은 직관적으로도 쉽게 이해된다. 이로써 빛은 파동이자 입자라는 ‘이중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확립되었고 200년을 이어온 대립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한 시대의 종막이 아니라 다음 시대를 여는 서막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뒤이어 곧 빛뿐 아니라 모든 물질이 이중성을 띤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2가지의 상호모순적 특성이 본질적인 측면에서 어찌 융합되어 있는지는 여태껏 해명되지 않았다.

이론을 떠난 일상생활에서는 무지개의 신비로움이 더 인상적이다. 무지개는 비가 온 뒤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작은 물방울들에 햇빛이 굴절되어 만들어진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마치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을 ‘빨주노초파남보’라는 ‘일곱 빛깔 무지개’로 펼쳐낸다. 물론 무지개의 실제 색깔은 무한 가지다. 컴퓨터 용어로 ‘트루 컬러’(true color)라고 하는 색깔의 가짓수는 16,777,216(224)이지만 무지개야말로 진정한 트루 컬러다. 그런데 이 모든 색깔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 자연의 실체는 아니다. 다른 동물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색깔을 보기도 한다. 또한 같은 빛이라도 우리와 똑같은 색깔로 본다는 보장도 없다.

그동안 선거철만 되면 이른바 색깔 논쟁이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는 어떤 색깔이라 불순하며 심지어 위험하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사람이 가진 사상의 색깔은 빛의 색깔보다 훨씬 복잡하다. 게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색안경을 끼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 대선에서는 이유야 어떻든 이 해묵은 논쟁이 수그러들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구시대의 유물과 색안경을 완전히 벗어야겠다. 그리하여 환상이 아닌 실체를 뚜렷이 볼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갔으면 한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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