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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구원을 요청하는 식물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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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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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병원균 등의 공격받으면 화학물질 배출… 냄새 파악해 농작물 보호하는 장치 개발

사진/ 식물은 살아남기 위해 곤충들에 맞서야 한다. 일개미, 제주왕나비의 애벌레, 청잎벌레, 코주부원숭이, 도롱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식물은 자신들을 먹을거리로 삼는 초식동물과의 관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진화과정에서 체득한 나름의 방어기제를 이용해 초식동물의 식욕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다. 많은 식물들은 ‘타닌’(tannin)을 화학적 보호막으로 사용한다. 타닌은 입사귀의 맛을 쓰고 떫게 해서 초식동물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한다. 하지만 식물들이 타닌을 만들어 전방에 배치하려면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부 희생을 감수하면서 초식동물과의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초식동물들 역시 식물들의 방어전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했다. 식물들 주변에서 서식하는 초식동물들의 독특한 생김새는 식물을 먹이로 섭취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인 셈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생물로 꼽히는 ‘별코두더지’는 마치 외계생물처럼 생겼다. 두더지의 코 둘레에 있는 22개의 부속지(附屬肢)는 주변을 탐색할 때 흐물흐물 움직인다. 부속지의 1㎠ 이하의 부위에 2만5천개 이상의 특수기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촉감을 발휘해 냄새를 맡지 않고도 먹이를 찾을 수 있다.

식물과 초식동물의 오래된 전쟁


이렇게 초식동물들이 놀라운 성능의 감각기관을 동원해 달려들 때 식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식물들도 당하고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일단 식물들은 화학물질을 빠른 속도로 분비해 이웃의 동료들에게 경계경보를 내린다. 초식동물의 공격에 대한 일종의 비밀 경고 시스템을 작동하는 것이다.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학의 식물학자 데이비드 로즈 교수는 천막벌레나방의 유충 등 해충의 공격을 받은 붉은오리나무와 시트카버드나무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로즈 교수에 따르면 해충의 공격을 받은 나무의 잎사귀가 곤충의 대사물질을 늦추는 페르몬으로 추측되는 화학물질을 배출한다.

식물들은 해충뿐 아니라 가뭄·질병 등의 스트레스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반응한다. 포플러와 사탕단풍나무 등은 묘목의 잎을 떼어내는 물리적 손상에 페놀이라는 방향성 화합물을 방출한다. 페놀은 나비 유충의 성장을 방해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식물은 흔히 에틸렌을 분비하기도 한다. 이런 분비물은 식물의 눈물이라고 한다. 때론 식물들이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독일 응용물리학연구소는 물이 부족한 담배나무와 냉기에 노출된 제라늄 묘목에서 기체를 채취해 ‘소리’를 채취하기도 했다. 기체에 적외선 레이저 광선을 쏘이면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떤 식물들은 상처를 받으면 최면제를 분비하고 모든 정상적인 신진대사를 늦추기도 한다. 벼 모종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나의 최면제인 페노바르비탈과 비슷한 물질을 분비한다. 이 물질은 정상적인 수면운동을 정지해서 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저장된 생명에너지를 보존한다. 아무리 전자현미경으로 식물체의 표면을 살펴봐도 미세감각기관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뇌나 신경계도 없다. 그러면서도 식물들은 미세한 질감을 감지해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일 식물체에 있는 독특한 대화수단을 제대로 파악하면 농민들이 재배식물의 건강상태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식물들에게 대화 능력이 있고 간단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일까. 식물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표현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반응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식물들이 땅 속 부분에서 질병의 공격을 받는 경우, 이 질병의 공격이 모두 끝나야만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땅콩이나 면화, 감자 등에서 나타나는 일부 질병은 수확철에 이르기까지 감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설령 수확 시점에 이르러서 식물의 반응을 감지하더라도 이미 손쓸 방법이 없게 된다.

초식동물이나 해충의 공격을 받고 화학물질을 배출하는 식물들은 일부 질병의 공격에 대해서 온몸으로 저항한다. 미국 조지아대학 농업환경대학의 글랜 래인스 박사는 “식물체가 질병의 공격에 대한 반응으로 특정 화학물질을 생산해낸다. 이 물질을 조기에 발견하면 농작물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식물체의 여러 반응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래인스 박사는 여러 해충과 질병으로 인한 공격이나 영양소 또는 물이 부족한 시점에서 식물체가 배출하는 각기 다른 냄새를 구분하는 연구를 한다. 언젠가는 이에 관한 카탈로그를 만들어 농가에 보급하려고 한다.

래인스 박사는 식물체가 배출하는 화학물질을 검출하는 장치를 개발하기도 했다. 식물체가 배출하는 냄새를 정확히 감지하는 것이다. 이 장치를 활용하면 식물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원격지에서 파악해 대처할 수 있다. 예컨대 땅콩을 공격하는 누룩곰팡이에서 나오는 유해독소인 ‘아플라톡신’(aflatoxin)을 알아내면 농민들의 손실을 막을 수 있다. 육안으로 아플라톡신이 땅 속에 있는지 없는지를 감지하기는 매우 힘들지만 검출장치를 이용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아플라톡신에 감염된 구역을 분리하고, 나머지 온전한 땅콩들을 손실 없이 수확할 수 있게 된다.

식물이 동물의 냄새를 맡고 있다

사진/ 식물체가 내뿜는 화학물질을 알아내는 검출장치가 채소밭에 설치돼 있다. 미국 조지아대학의 글랜 래인스 박사팀이 이 검출장치를 개발했다.
식물체가 내뿜는 화학정보를 제대로 파악하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세포조직에 물리적 손상이 일어날 경우 식물들은 자스몬산(jasmonic acid)이라는 호르몬을 방출한다. 이 호르몬은 식물의 방어기작에 의해 생성되는 화합물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하는 데 쓰인다. 곤충이 공격할 때 주로 발생하는 자스몬산은 휘발성이 있어서 이웃한 식물에게 경고신호를 보내는 구실을 한다. 검출장치로 자스몬산을 확인하면 아스피린을 써서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아스피린은 식물이 물리적 손상을 입었을 때 생성하는 고통 반응 화합물의 생성을 막아준다. 물론 이런 혜택은 값비싼 관상용 식물이나 누릴 수 있다.

식물의 반응을 보여주는 수용체는 동물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동물세포의 수용체가 맛이나 냄새와 관련된 화학적 메시지를 받아들이듯 식물도 비슷한 방식으로 외부 자극에 대해 반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식물과 동물은 페로몬 작용에 의해 직접적인 교류를 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인간이 검출장치를 통해 서로의 의사소통에 개입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진화과정에서 먹고 먹히면서 생태계 균형을 이뤄온 식물과 초식동물들. 이제 초식동물들은 식물의 냄새를 맡기 전에, 식물이 자신을 어떤 냄새로 반응하는지 먼저 신경써야 할지 모른다. 식물은 지금 동물의 냄새를 인간에게 보내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참고자료 : 라이얼 왓슨의 <코- 낌새를 맡는 또 하나의 코 야콥슨 기관>(이한기 옮김, 정신세계사 펴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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