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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상의 흔적에 부활의 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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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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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시인의 자취 남아있는 제비다방 헐릴 위기… 문화예술계 인사들 건물 구입 위한 대책 마련

사진/ 제비다방은 복원될 것인가. 이상이 20여년 동안 거주한 종로 기와집이 헐릴 위기에 놓였다. (류우종 기자)
당시 사람 많은 종로에서도 그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훤칠한 키에 회분칠을 한 듯 유달리 하얀 얼굴, 아마도 구본웅이 그린 초상화에서처럼 삐뚜름히 중절모를 눌러쓰고 파이프를 입에 문 채 휘적휘적 걸어갔을 것이다. 그를 잠깐 불러세우고 “제비다방 어떻게 되었나” 말을 붙여본다면 그는 별 볼일 없다는 얼굴로 “손 턴 지 언젠데” 하며 고개를 돌릴지 모르겠다. 스물여덟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불안과 허무가 짙게 드리운 난해한 시와 소설로 우리 근대문학의 풍경을 일신한 천재 작가, 낯선 이국의 병원침대에 누워 레몬 향기를 그리워하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던 이상(1910~37). 70여년 세월 넘어 ‘제비다방’이 다시 부활한다면 그는 저승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날개> <종생기> <12월12일> <오감도> 등 다수의 문학작품을 통해 그는 짧은 생애 동안 풍요로운 예술세계를 펼쳤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총독부에 소속돼 건축가로 일했고 선전에 <자화상>으로 입선하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삽화를 연재한 만능 예술가였다. 하지만 다채로운 재능만큼 오늘날 이상이 거닐었던 동선을 좇아 그를 기억할 만한 공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화신백화점 맞은편에 차렸다던 ‘제비다방’ 자리엔 제일은행이 들어섰고, 그 밖의 다방 ‘학(쓰루)’ ‘69’ 역시 고층건물로 변해버렸다.

20여년 거주한 이상 문학의 모태


사진/ 종로 일대에는 문인들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다. 연희전문을 다니던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었던 곳(왼쪽)과 현진건의 집터(위). (류우종 기자)
현재 그의 개인적 역사가 묻어 있는 유일한 장소는 종로구 통인동 154번지에 있는 작은 기와집이다. 그는 젖먹이 무렵 큰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이 집에 들어가 1932년 큰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스무해 넘게 살았다고 한다. 5년 전 이 집의 연원이 소설가 오인문(60)씨에 의해 알려지면서부터 이상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연구자들 사이에선 비공식적인 답사코스가 돼왔다. 하지만 이곳마저 최근 헐릴 위기에 놓였다. 20여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아온 주인 박아무개(68)씨가 집이 좁고 낡아 더 이상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부동산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12월5일 이상의 집을 찾았다. 골목길을 걷다 눈을 들면 오른쪽으로는 북악산, 왼편으로는 인왕산이 보이는 경치 좋은 자리다. 하지만 주변 이웃건물 상당수는 이미 다세대 주택으로 변신을 거듭해 아무런 대책 없이 팔릴 경우 앞날을 예고해주고 있었다. 집터 22평에 건물은 10평 규모로 ㄱ자형 한옥틀을 유지하고 있는 이 집은 현재 책대여점과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다. 주인 박씨는 “이웃한 옆집과 묶어서 함께 집을 짓고 싶다며 팔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집이 유명한 문인의 집이라 섣불리 결정할 수 없어 곤혹스런 상황이다”고 전했다. 집안에 들어가봤다. 이상이 자신의 집에서 하숙을 하던 보성고보 동창 문종혁과 함께 뒹굴었을 건넌방 자리에 잠깐 섰다. 문종혁의 회고대로라면 이상은 이곳에서 “이불 속에 엎드려 뭔가를 끄적거렸을 것이며, 두터운 무괘지노트에 바늘끝 같은 날카로운 만년필 촉으로 쓴 씨들을 보관해두었을 것”이다(<문학사상> 19호, 1974년 4월호). 곧 이 집은 이상이 문학에의 꿈을 차근차근 키워나간 공간인 셈이다.

이 집이 무작정 헐려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여러 갈래에서 어떻게 해서든 이 공간을 지켜낼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상리뷰>라는 간행물을 내고 있는 ‘이상문학회’는 회원 출자 또는 대중 모금을 통해 건물 매입을 검토 중이다. 이상문학회 편집위원인 이경훈 교수(연세대)는 “처음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회원 한명이 매입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결국엔 여러 사람의 공간으로 쓰여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적인 절차를 밟아 구입하고 운영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시적으로는 카페로 운영하고 세미나, 기획전시 등을 여는 방법을 계획 중이다.

건물 구입비 십시일반으로 준비할 예정

건축가 김원(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씨 역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역량을 모아 이 집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www.kimwonarch.com) 게시판에 이 문제를 띄워놓고 의견을 모으는 한편, 뜻있는 문화계 인사들과 접촉 중이다. “규모가 작은 길갓집이라 손쉽게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것 같은데 천행으로 아직은 살아남아 있습니다. 팔리기만 하면 즉시 헐려서 다세대 주택이 들어서겠지요. 안 될 줄 알면서도 서울시에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역시 신경쓸 곳이 많아서 거기까지 손이 갈 수 없겠다는군요.” 그는 이 집을 구입해 개보수한 뒤 ‘제비’라는 이름(또는 69)으로 카페를 열고 ‘이상팬클럽’을 조직해 항구적인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방법을 구상 중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으로는 얼추 땅값·개보수·인테리어비용 등으로 3억7천여만원을 잡았다.

이상의 집뿐 아니라 종로 일대엔 옛 문인들의 흔적이 많다. 십여년 전 다세대 주택으로 변한 누상동 9번지는 연희전문을 다녔던 윤동주의 하숙집이자 해방 이후 <백민잡지>를 낸 소설가 김송의 집이다. 윤동주는 이 집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시집을 썼다. 졸업기념으로 책을 내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방에 앉아 일일이 펜으로 옮겨적었던 것이다. 이렇게 3권을 만들어 한권은 동창생 정병욱에게, 한권은 스승인 이양하에게 맡기고, 나머지 한권은 자신이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부암동사무소를 왼편에 둔 채 무계정사길을 올라가면 현진건의 집터(부암동 325-2번지)에 이른다. 까치집만 동그마니 남아 있는 키높은 은행나무 2그루가 지키고 선 초라한 폐가. 현진건은 작가와 동아일보 기자생활을 함께 하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1년 동안 옥살이를 치른 뒤 1937년 이곳에 접어든다. 하지만 경제사정이 어려워지고 결핵마저 악화되자 43년엔 이 집을 팔고 동대문구 제기동 조그만 초가로 이사간 뒤 그해 바로 죽음을 맞는다. 현진건의 쓸쓸한 인생 말기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 집 앞에 서면 한층 처연히 다가온다.

문인들의 텃밭을 갈아엎을 수는 없다

이 밖에도 종로 곳곳엔 노천명·이광수·박종화 등 굵직굵직한 문인들의 자취가 서려 있다. 이렇게 문인들이 종로에 깃들인 것은 근·현대에 들어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조선 중·후반기 접어들어 중인을 중심으로 ‘위항(도시 주거지란 뜻)문학’이 종로를 근거지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 위항시선집인 <육가잡영>은 역관·의원 등 중인 출신 시인들이 삼청동에서 열린 시모임을 통해 지은 시를 뽑아놓은 것이다. 숙종대 지금의 사직동·누상동·옥인동 일대엔 가난한 위항시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해 정기적으로 시사(창작활동을 위한 동인 모임)를 열었다. 옥인동에 새 길이름으로 붙여진 ‘송석원길’은 바로 이 위항문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정조대 천수경이란 중인은 지금의 옥인동으로 이사를 와 소나무와 바윗돌 아래에 초가집을 짓고 ‘송석원’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송석원에 모여 옥계사라는 시사 회원들은 시를 짓고 놀았는데, 봄가을엔 수백명이 운집했다고 전한다. 옥계사가 문명을 떨치자 나중엔 사대부와 공동시집을 냈으며 1817년엔 추사 김정희가 손수 바위에 ‘송석원’ 세 글자를 써줬다.

종로가 문인들의 텃밭이 된 것은 이렇게 수백년 동안의 전통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어떻게 이 맥락을 지키고 가꿔나갈 것인가. 이상의 집은 그 가늠자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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