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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시 속의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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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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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과학을 공부하다 보면 한 용어가 여러 곳에서 두루 쓰이는 경우를 가끔씩 볼 수 있다. 프로젝션(projection)이란 용어도 한 예다. 어원으로 볼 때 본래적인 뜻은 ‘앞에(pro) 던지기(jection)’, 곧 ‘투척’, ‘사출’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로부터 약간 변형돼 나온 ‘투사’, ‘투영’이란 뜻이 가장 널리 쓰인다. 그 이유로는 무엇보다 이 뜻에 담긴 시각적 인상의 강한 호소력을 들 수 있다. 영화에서의 영사가 대표적 예다. 프로젝션 텔레비전과 OHP란 약자로 흔히 부르는 오버헤드 프로젝터(overhead projector)도 이에 속한다. 한편 수학에서는 ‘사영기하학’이라는 독립적 분야가 형성돼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돼 미술 역사상 중요한 진보를 하게 한 원근법도 넓은 관점에서 볼 때 프로젝션의 하나다.

이 가운데 정신분석학에서의 용례는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꼽을 만하다. 정신분석학에서의 투사는 이른바 ‘방어기제’의 하나로 여긴다. 여기서 ‘방어’라고 함은 현실을 직시하기가 너무 괴로울 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흔히 드는 예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증오심이 있다. 사람들은 증오심을 나쁜 감정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런 감정이 자신에게 싹트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이에 따라 무의식은 이를 막기 위해 보이지 않는 활동을 개시한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미워지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증오심을 상대방에게 투사해 상대방이 먼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의 증오심이 정당화돼 심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투사는 방어기제다. 미워하기는 하되 어디까지나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데 우선적 목표가 있다. 따라서 그것이 남에 대한 공격으로 직결될 가능성은 의외로 낮다. 그런데 근래 우리는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의 행동에서 약간 비정상적 흐름을 느낀다. 현재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지나친 투사를 함으로써 수많은 마찰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방어를 넘어 공격과 지배를 위해 이 기제를 이용한다. 이라크와의 관계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후세인을 두둔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부시 대통령은 9·11 사태 이후 치솟기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 의지를 거의 일방적으로 후세인에게 투사시키고 있다. 이제는 정말 실제의 적이 이라크에 있는 후세인인지 부시 속의 후세인인지 모를 지경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른 나라들에도 자신의 투사를 강요한다. 그리하여 자기네 공격에 동참하면 테러 반대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테러 지원국이라고 몰아붙인다.

채 피지도 못한 우리의 두 꽃망울이 미군의 무한궤도에 짓밟혔다. 그에 대해 온 국민이 공분을 느끼는 가운데 유엔사령부는 어처구니없게도 이미 사문화된 규정을 들먹이며 민족 내 교류의 발목을 잡았다. 오직 그들의 편의에 따라 누구든지 악의 축도 되고 부시 속의 후세인도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일까 그러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얼뜨기 흉내는 곤란하다. 2천년 전과는 시대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현대의 진정한 대국이고자 한다면 오만방자한 투사에 앞서 겸허한 현실 직시부터 시현해보이기를 촉구한다.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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