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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유의 여정, 유목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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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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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의 고원>, 새로운 사유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

사진/ 노마디즘 1, 2, 이진경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각권 2만8천원
화려한 명성 속에 오히려 고독한 사상가들이 있다. 100년 전쯤이라면 니체를, 우리와 동시대인이라면 아마도 들뢰즈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니체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독특하고 꼼꼼한 니체 주석가로 소개된 바 있는 들뢰즈는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상열풍 속에서 포스트모던 철학자로 명성을 누렸다. 그가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 첫 번째 장 ‘리좀’(rhizome)은 그 당시 고상하고 폼나는 글에서는 빠짐없이 인용되곤 한 단골메뉴였다. 그러나 <천의 고원>은 빛나는 아우라 속에서 사실은 터무니없는 몰이해에 시달린 셈이다. 이 책은 모든 거대담론을 거부하거나 원본과 복제를 구별할 수 없는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미국화된 천박한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건 나치즘의 열광에 빠져 니체의 책들에 감동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실천적 사유자, 그들의 욕망과 혁명

사진/ 카타리와 함께 <천의 고원>을 쓴 질 들뢰즈(사진)는 '만남의 철학'을 사유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두꺼운 책이다. 분량에서도 그렇지만 책의 용법에서도 그렇다. 먼저 저자 자신에게는 들뢰즈·가타리를 깊은 고독이나 엉뚱한 오해에서 구출하고 그들과의 우정을 쌓는 데 사용된 책이다. 철학 참고서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천의 고원>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다. 80년대 이후 줄곧 혁명과 해방을 꿈꿨지만 지금은 실패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혁명을 위한 하나의 제안서일 수 있다.


또 다른 방식으로 무수히 증식될 수 있는 용법들 가운데도 새로운 혁명의 제안서로서 이 책이 가지는 매력은 특별하다. 지은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천적 사유자이며 혁명적 실천가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에게 우정을 느끼고 그들과 함께 이런 물음을 던진다. 혁명은 모든 개인적 욕망을 포기하고 의무나 인내심으로만 버티기를 강요하는, 그래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옛 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가 왜 전직 혁명가는 그렇게 쉽게 독재자로 변질되는 걸까 우리의 소박한 물음은 <노마디즘>에서 “욕망은 혁명과 결합될 수 없는가”라는 철학적 표현으로 명징하게 되풀이된다. 이것은 권력이 우리의 순수한 욕망을 억압하고 그 욕망이 권력에 대항한다는 상투적인 대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노마디즘>에서 우리는 “항상 권력에 대립하는 순수한 욕망은 없고 욕망이란 늘 배치의 문제”라는 들뢰즈의 색다른 대답과 만난다. 들뢰즈는 사물이 어떤 배치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듯 욕망도 그렇다고 부언하지만 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노마디즘>에서는 고마울 만큼 친절한 설명을 덧붙인다.

자, 월드컵을 생각해보자! 당신들이 미국과의 축구경기에서 ‘날아가는 공’을 본다면 이 공의 의미는 뭐지 그 공 사이에 한국 선수 둘이 배치되어 있다면 그 공의 의미는 패스. 만일 한쪽이 미국 선수라면 그 공의 의미는 패스미스. 그 공 앞에 한국 선수가 있고, 공 뒤에 미국 골대의 그물이 있다면, 그 공의 의미는 골인. 미국 골대가 아니라 한국 골대였다면 그래, 그렇지! 자살골이지. 이처럼 한 사물은 배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욕망도 어떤 배치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이런 재미난 예들을 따라가다 보면 좋은 욕망, 나쁜 권력의 단순 이분법이란 없으며, 새로운 삶의 배치, 욕망의 배치를 어떻게 창안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욕망, 우리의 신체는 전혀 다른 질과 빛깔을 얻는다는 멋진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또한 모든 흐름을 고착하고 경직시키려는 경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고자, 즉 유목하고자 할 때만 늘 새로운 삶의 배치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노마디즘(nomadism), 즉 ‘유목주의’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다.

그러나 <노마디즘>에서 개인적 결단으로 모든 것을 해소하는 어설픈 실존주의 냄새가 풍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의 배치를 가로막고 욕망을 낡고 병들게 고착시키는 사회적·정치적 포획장치들이 분명히 있으며, 이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집합적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때문에 이 책의 12·13장은 특별히 중요하며 거기에서 우리는 80년대 가장 진보적 좌파 이론가인 그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어떻게 새로운 혁명의 세기와 조우하는지를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친구를 찾아 삶을 탐사하는 여행

우리는 그 사유의 여정을 유쾌하고 따스한 동감의 마음으로 볼 수도 있고, 조금은 불편하거나 석연치 않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노마디즘>은 친구들을 찾기 위한 책이란 점이다. 이 책은 강의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저자는 실제로 몇년간 <천의 고원>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가르치기 위한 형식으로 채택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형식이 아니었다면 그는 더 자유롭고 춤추는 걸음걸이를 취했을지 모르고 좀더 폼나는 책이 되었을지 모른다.

천재는 흡사 유형장에서 비열한 악한들에게 시달림받는 정치범처럼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버릇이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 적 있다. 사실 공부깨나 하는 이들은 누구나 조금씩 천재-콤플렉스가 있어 난해함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숨기려고 한다. <천의 고원>을 비롯한 제법 괜찮은 많은 책들이 읽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나 <노마디즘>은 정말 친절하다. 저자는 우정 때문에 강의록이라는 쉽고 친근한 형식, 조금은 평범한 스텝을 취했다. 아니, 그것은 걸음이 아니라 차라리 손이다. 그는 한꺼번에 수많은 손들을 내밀면서 벗들의 수많은 손들이 그것을 덥석 잡아 채어가기를 바란다.

혁명은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할 때만 성공한다. 혁명이란 말의 색깔이 너무 붉고 부담스럽다면 새로운 삶을 탐사하는 여행쯤으로 해두자. 책의 마지막 장 ‘무아(無我)의 철학과 코뮌주의’가 보여주듯 그는 그 친구들의 손을 잡고 들뢰즈나 가타리보다 더 멀리, 더 즐겁게 나아가길 꿈꾼다. 이 소박한, 그러나 두꺼운 글쓰기로 그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북적대는 붐비는 삶을 바란다. 이 책이 그에게 명성보다는 수많은 친구들을 가져다주기를! 사실 명성이란 회의장에서 처음 만나는 사이에나 필요한,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선 아무 쓸모없는 이름표 같은 거니까.

진은영/ 시인 dicht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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