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아, 잘들 있지?
등록 : 2002-12-11 00:00 수정 :
토요일 오후, 전날의 과음 탓인지 어수선한 퇴근을 준비하는데 노란머리의 아가씨가 삐죽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영광에도 저렇게 샛노란 머리가 있네, 저거이 누구다냐’ 속물음을 몇초 하고 보니 “오메 오메, 성희(가명) 아니냐 오랜만이다” 반가움에 마음이 달뜬다. 그 뒤를 성희엄마가 들어서며 “잘 있었느냐, 점심은 먹었느냐”고 한달음에 인사말을 내어놓는다.
같은 지역에 살았어도 1년의 세월을 시나브로 잊고 쫓겨 살았나 보다.
눈이 예쁜 아이인 성희는 고3 인문계 졸업반인데 올 초 취업반을 지망해 광주에서 자취하며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녔고, 신학대 수시원서를 내놓고 면접까지 마쳤다. 샛노란 머리 그대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야무지고 착한 소녀 같은 아이가 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사회로의 첫발이 활기차 보인다. 맘고생 많은 성희 남동생도 내년이면 실업고 취업반이다. “이제 아이들 다 크고 엄마는 효도 받을 일만 남았네”라는 내 부러움이 성희엄마도 싫지 않은 내색이다. 지난해 목사님이 운영하던 아동시설로 취업 겸해서 온 가족이 이사한 뒤 사무실 식구들을 집들이에 초대했을 때 가보지 못한 것이 내내 서운했는데, 너무 밝은 모습으로 들어선 모녀의 모습을 부끄러운 뿌듯함으로 간직해도 될는지.
2000년 소박하게 시작한 ‘희망가족’ 모임의 큰언니 격인 성희는, 이혼한 부모가 맡겨놓은 할머니 집에서 불안한 학교생활을 하던 O는 서울엄마한테 갔다가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고, J는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울에서 무지 고생한다며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이들 소식을 조잘댄다.
열심히 1년 새 있었던 일을 묻고 답하다가 “선생님, 지금도 ‘희망가족’ 모임하세요”라는 물음에 갑자기 할말이 없어진다. 어정쩡하게 시골에 맡겨진 아이들, 부모가 있어도 짐인 아이들, 한부모 아이들에게 작은 버팀목이라도 돼보자고 시작한 ‘희망가족’ 아이들에게 면목이 없다.
“아니 지금은 못하고 있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뱉고 나니 변명이 궁색해진다. “제대로 책임도 못 지면서 아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진단과 참가회원들의 개인 사정을 핑계로 두해를 겨우 마치고 접은 ‘희망가족’ 모임이 아프게 살아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하게 모인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뭘 함께 할지 고민하던 어른들과 달리 ‘희망가족’이 아이들에게는 비빌 언덕이라도 됐는지 모르겠다는 뒤늦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이들에겐 한순간의 추억도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연히 길에서 만나면 수줍은 듯 얼굴을 떨구기도 하고, 뒤에서 덜컥 안아주는 아이들…. 그 아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이미 영광을 떠났다.
“‘희망가족’은 모임이었는데 왜 없어졌나요” 성희가 남긴 한마디가 큰울림으로 덩그마니 남아 있다.
“얘들아, 잘들 있지”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