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여성의 운명’이라는 테마 되풀이하는 최근 TV 드라마… 신분상승의 욕망을 대리배설 하다
“난 사실은 이 집 애가 아닐 거야. 진짜 아빠는 부잔데 어디선가 나를 찾고 있을 거야.” 어렸을 때 부모님께 호되게 야단맞은 날이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심리를 십분 이용한 드라마가 방송 3사에서 나란히 방영중이어서 눈길을 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9월18일 시작한 미니시리즈 <가을동화>(연출 윤석호, 극본 오수연), 문화방송이 9월13일에 시작한 <비밀>(연출 김사현, 극본 정유경), 서울방송의 드라마 <덕이>(연출 장형일, 극본 이희우)가 그것이다.
콩쥐, 팥쥐의 갈등을 보는 재미
이들 세 드라마의 특징은 ‘뒤바뀐 운명’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뒤바뀐 운명이라는 모티브는 고래로부터 사랑받아온 모티브다. 그런데 왜 <왕자와 거지>는 현대에도 유효한가? 혹은, 현대이기에 더 유효한가? 대답은 그렇다, 이다. 거지 톰은 궁전 안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지만, 현대의 서민들은 화려한 창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 창의 이름은 텔레비전이다. 보는 것은 욕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급간 이동은 여전히 쉽지 않다. 동대문시장에서 옷파는 처녀가 유명 브랜드에 근무하는 잘 나가는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은, 거지 톰이 에드워드 왕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꿈이다. 욕망은 증가하는데 가능성은 여전히 불가능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뒤바뀐 운명’이라는 모티브가 현대의 서민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자와 거지>와 현대 한국의 TV드라마가 다른 점이 있다면 운명을 훔치는 자가 여자라는 점이다. 팥쥐가 콩쥐의 운명을 훔치는 식이다. 콩쥐는 원래 부잣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야 했는데 가난한 집에서 고생을 하고, 팥쥐는 가난한 집에서 아등바등 고생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이게 자기 자리인 양 부잣집에서 산다는 식이다. <덕이>에서 귀진이(강성연)는 양녀를 원하는 집에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귀덕이(김현주)가 가야 할 양녀 자리를 빼앗아 부잣집에서 자라난다. <비밀> 역시 마찬가지다.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일하는 희정(김하늘)과 코디네이터 지은(하지원)은 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자매로 큰다. 그런데 윤명애컬렉션을 이끌고 있는 부자엄마가 나타나 말한다. “내가 네 진짜 엄마다.” 한데 진짜 딸 희정이의 자리를 허영덩어리 지은이가 차지하고 놓지 않는다. 지은은 ‘비밀’이 밝혀질까봐 전전긍긍하며 희정이를 못살게 군다. <가을동화>의 경우는 좀 다르다. 팥쥐 신애야말로 부잣집 딸로 자랐어야 했는데 병원에서 은서와 운명이 바뀌어 어린 시절을 억울하게 고생으로 보낸 경우다. 국밥집 하는 엄마 밑에서 억척스런 아이로 자란 신애는 공주님처럼 자란 같은 반 친구 은서를 미워하는데, 교통사고로 은서의 혈액형이 밝혀져 두 사람은 열네살의 나이에 가정을 바꾼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은서에게는 두 남자가 다가오는데, 친오빠로 알고 자란 준서(송승헌)와 재벌2세 강민(원빈)이 그들이다. 강민을 사랑하는 신애에게 은서는 눈엣가시다. <가을동화>의 신애는 원래 부모를 찾아가므로 자기 운명을 정당하게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큰 범주에서 봤을 때 신애도 콩쥐의 운명을 빼앗은 팥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교수 아버지와 우아한 어머니 아래서 행복하게 살던 은서 공주님의 운명은 신애라는 불청객이 등장함으로써 산산이 부서진다. 은서와 남매 사이로 자란 오빠 준서가 은서를 여자로 느끼게 되자 산통을 깨놓는 것도 신애의 역할이다. 언제나 동정받는 ‘착한 여자’
이렇게 팥쥐들이 부아가 날 때는, 기껏 훔친 운명을 콩쥐들이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 날름 전복시킬 때다. 콩쥐 주위엔 콩쥐가 골라잡을 수 있는 남자들이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한방에 전세가 뒤집힐 수 있는 팥쥐들은 실제로는 관계의 헤게모니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의 행복은 자기 자신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고 부유한 부모 혹은 애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에서 지은은 김준호(류시원)와 조영민(김민종)이라는 두 떡을 양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짜 어머니 윤명애는 회사의 실권을 가진 기획실장 조영민더러 지은과 사귀라고 종용하고, 작지만 자기 매장과 공장을 가진 부잣집 도련님 김준호는 공식적으로는 지은의 애인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두 남자 모두 희정에게 빠져 있다. 귀진이의 양아버지는 귀덕이에 대해 온정적이라 귀진이는 항상 불안해한다. 게다가 귀진이에게는 언제든 귀진이를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은 석만, 지석, 왕오빠가 있다. <가을동화> 은서에게는 재벌그룹 막내아들 태석과 준서가 버티고 있다. 명분은 팥쥐가 가졌지만 실속은 콩쥐가 챙기는 셈이다. 따라서 팥쥐들은 자기가 뺏어온 운명을 언제 다시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태생적으로 팥쥐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즉, “넌 나보다 잘살면 안 돼”라는 것은 팥쥐들의 과욕이라기보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기본적 본능이다.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공분은 정의로운 콩쥐들이 대변한다. “너, 나빠! 너 정말 나쁜 애야!… 너 정말 나빠!”(<가을동화>의 은서) “내가 힘이 없어서 참는 줄 알아?”(<덕이>의 귀덕). 그러나 팥쥐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미미하며, 신세를 바꿔보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에 대해 페미니즘 저널 황금희 편집장은, “‘운명을 훔친 여자’는 남성들의 시각에서는 극성맞고 악한 여자로 묘사된다. 이들 드라마에 출연하는 남자들은 어느 한 여성의 편을 들게 되는데, 대개 ‘착한 여자’를 지지한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운명을 훔치는 팥쥐’에 대한 동정론도 높아지는 편이다. “귀진이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입니다.” “좀 멋진 남자를 귀진이 상대역으로 해주세요.” “신애와 태석을 맺어주세요.” 이런 유의 시청자 의견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팥쥐 역시 상류사회라는 낯선 무대에 자신을 놓아보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의 또다른 분신이기 때문에, 시청자 입장에서는 콩쥐의 팔자를 고치기 위해서 굳이 팥쥐를 고생시킬 필요까진 없는 것이다. 10여년 전 이들 드라마의 선배격이었던 <사랑과 진실>에서 원미경과 정애리도 결국 화해를 이루지 않았던가.
신분상승의 무기는 ‘왕자’를 만나는 것?
그런데 왜 방송 3사가 하나같이 ‘뒤바뀐 두 여성의 운명’일까? “왜 하필 ‘여자’의 엇갈린 운명이냐”는 질문에 대해, <비밀>의 김사현 PD는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가정환경으로 받는 여파가 적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한다. 즉 여자들은 남자에 비해서 가정환경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정도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속담이 대변하듯이, 적어도 드라마상에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강력한 신분상승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잘사는 것으로 복수를 하는 길도 있지만, 신세를 바꿔보려는 콩쥐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덕이는 집안을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한량 박영규 앞에서는 밑빠진 독이요, 옷가게를 살려보려고 잠 못 자고 뛰어다니는 희정의 노력은 지은의 전화 한통에 물거품이 된다. 결국 콩쥐는 남자로, 팥쥐는 권모술수로 팔자를 고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명을 훔친 팥쥐와 운명을 빼앗긴 콩쥐 중에서 왕자님이 누구를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팥쥐가 운명을 훔쳐봤자 콩쥐 팔자는 뒤바뀌지 않는다.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사진/<비밀>에서 희정(김하늘)의 운명을 훔친 지은(하지원)은 빼앗은 것을 지키기 위해 권모술수를 거듭할수밖에 없다)
<왕자와 거지>와 현대 한국의 TV드라마가 다른 점이 있다면 운명을 훔치는 자가 여자라는 점이다. 팥쥐가 콩쥐의 운명을 훔치는 식이다. 콩쥐는 원래 부잣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야 했는데 가난한 집에서 고생을 하고, 팥쥐는 가난한 집에서 아등바등 고생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이게 자기 자리인 양 부잣집에서 산다는 식이다. <덕이>에서 귀진이(강성연)는 양녀를 원하는 집에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귀덕이(김현주)가 가야 할 양녀 자리를 빼앗아 부잣집에서 자라난다. <비밀> 역시 마찬가지다.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일하는 희정(김하늘)과 코디네이터 지은(하지원)은 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자매로 큰다. 그런데 윤명애컬렉션을 이끌고 있는 부자엄마가 나타나 말한다. “내가 네 진짜 엄마다.” 한데 진짜 딸 희정이의 자리를 허영덩어리 지은이가 차지하고 놓지 않는다. 지은은 ‘비밀’이 밝혀질까봐 전전긍긍하며 희정이를 못살게 군다. <가을동화>의 경우는 좀 다르다. 팥쥐 신애야말로 부잣집 딸로 자랐어야 했는데 병원에서 은서와 운명이 바뀌어 어린 시절을 억울하게 고생으로 보낸 경우다. 국밥집 하는 엄마 밑에서 억척스런 아이로 자란 신애는 공주님처럼 자란 같은 반 친구 은서를 미워하는데, 교통사고로 은서의 혈액형이 밝혀져 두 사람은 열네살의 나이에 가정을 바꾼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은서에게는 두 남자가 다가오는데, 친오빠로 알고 자란 준서(송승헌)와 재벌2세 강민(원빈)이 그들이다. 강민을 사랑하는 신애에게 은서는 눈엣가시다. <가을동화>의 신애는 원래 부모를 찾아가므로 자기 운명을 정당하게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큰 범주에서 봤을 때 신애도 콩쥐의 운명을 빼앗은 팥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교수 아버지와 우아한 어머니 아래서 행복하게 살던 은서 공주님의 운명은 신애라는 불청객이 등장함으로써 산산이 부서진다. 은서와 남매 사이로 자란 오빠 준서가 은서를 여자로 느끼게 되자 산통을 깨놓는 것도 신애의 역할이다. 언제나 동정받는 ‘착한 여자’


(사진/<가을동화>에서 은서(송혜교)는 불행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막강한 위치에 서 있다)

(사진/<덕이>에서 귀진이는 양녀를 원하는 집에 보내는 편지를 위조해 귀덕이가 가야 할 양녀자리를 빼앗아 부잣집에서 자라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