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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독재자의 밀가루는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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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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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밀 칼국수 한 그릇 앞에 두고 대선 전략으로 수입밀가루 뿌린 박정희와 JP를 생각하다

사진/ 우리밀 칼국수는 고소하고 쫄깃한 면발이 일품이다.
1961년 5월16일, 육군소장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을 몰아냈다. 박정희는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쿠데타 세력의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는 허수아비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박정희와 그의 조카사위인 육사 8기생 김종필(JP)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고, 북한의 남침 야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혁명’을 했다고 했지만, 이후의 전개과정을 보면 정권욕에 빠진 정치군인들이 민주정부를 전복한 반란행위일 뿐이었다.

하여튼 군대를 틀어쥔 박정희는 자기들끼리 서로 치고받는 수차의 반혁명 사건을 겪으며 권력을 공고히 해갔는데, 여기에는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이 땅에 공작정치를 실행하고 공안사건을 조작하게 한 JP가 큰 역할을 했다. 쿠데타의 성공으로 졸지에 권력맛을 본 박정희는 군으로 원대복귀하겠다고 하다가는 갑자기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등 갖은 술책을 부렸지만, 나라 안팎의 압력으로 결국 민정이양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1963년 10월15일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은 제5대 대통령 선거인데, 이 선거는 매우 근소한 차이로 결판이 났다. 총 1100여만표 가운데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46.65%인 470만2642표를, 윤보선은 45.1%인 454만6614표를 얻어 두 사람의 표 차이는 15만6028표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북한의 상황과 같지는 않지만, 60년대 초 남한 역시 식량난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해마다 음력설이 지나고 나면 동네마다 양식이 떨어진 집이 숱하여 초여름 보리가 나기까지 2~3개월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허기진 뱃속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1963년 여름에는 태풍 ‘셜리’가 호남평야를 덮쳐 수십만의 수재민들이 발생했고, 이로써 그해 가을 쌀농사는 대흉년이었다.

이런 흉흉한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는 초보 정치인 박정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박정희와 JP 등이 꾀를 낸 것이 수재민 구호였다. 이들은 일본·미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밀가루와 원맥을 도입해 수재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었고, 나머지는 민간업자에게 헐값으로 불하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이것이 설탕·시멘트의 매점매석과 함께 이른바 ‘삼분폭리’라 이름붙은 박정희 정권 초기 최대의 부정부패사건이다.


이렇게 도시 서민층과 농촌을 밀가루로 범벅해놓았으니, 그 상황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임기 내내 야당으로부터 ‘밀가루 대통령’이라고 공격받았다. 박정희의 당선은 이후 20여년간 이 땅 민중들의 자유를 말살하고 민생을 탄압하는 암흑의 역사를 예고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넘쳐나는 공짜 밀가루에 치여 삼국시대 이후 이 땅에 뿌리박아온 우리밀을 멸종시켰다.

이로부터 40여년이 지났다. 방방곡곡에 밀가루를 뿌려 독재자 대통령 박정희를 탄생시키고 우리밀을 사라지게 한 약관의 JP도 이제는 몸도 마음도 늙은 것 같다. 요즈음은 자기 힘으로는 안 되는지 어쩔 수 없이 정치철새를 앞세워 남의 밥상에 잿가루를 뿌리려고 한다.

10여년 전부터 어렵사리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농촌 전체가 피폐해지는 이 판국에 저가 물량공세의 미국산 밀가루에 우리밀이 버티기가 쉽지는 않으니, 우리밀을 심고 보급하려는 뜻있는 분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서 우리밀 칼국수집(02-574-1421)을 열고 있는 정무균(56)씨는 우리밀 보급의 열렬한 전도사다. 정씨는 1995년부터 칼국수집을 해왔는데, 몇년 전 우연히 <한겨레>에서 수입 밀 속에 잔류농약·방부제 등 해로운 첨가물들이 많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수소문 끝에 무공해 우리밀을 구해 지금껏 칼국수를 만들어왔다. 이 집의 우리밀 칼국수는 고소하고 쫄깃쫄깃한 면발에 자연산 다시마, 재첩, 새우, 북어, 버섯, 멸치와 각종 채소 등 20여 가지가 들어가는 국물이 무척 시원하다(칼국수 4500원, 만두 5천원).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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