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들 추상적 구호 나열식 공약 일색… 과학기술자 신뢰로 ‘앵벌이 박사’는 이제 그만
16대 대선에도 어김없이 과학계를 위한 공약이 쏟아졌다. 어떻게 실현할지는 제쳐두고라도 각 당이 제시한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공약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누가 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적임자인가를 판별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정치권에서 과학기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 나온 후보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공약은 홈페이지를 통해 구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각 과학발전에 대한 공약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분석하기에 좀 어려운 것이다. 한 당은 각종 공약이 기록된 무려 100쪽이 넘는 한글 워드 파일만을 그냥 첨부해놓았고 다른 한 당은 웹에 요목별로는 정리가 되어 있었지만 각 내용을 보충해줄 수 있는 설명이 크게 부족해 구호성 문안 정도의 수준이었다.
구체적 분석 없이 현장 의견만 청취
요즘처럼 웹페이지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시대에 대선주자들의 홈페이지는 솔직히 기대 이하였다. 예를 들어 특정한 단어에 대한 탐색기능이 없어서 후보자가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어떤 공약을 제시하였는지, 또 그에 관하여 어떤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구체적인 자료제시도 아쉬웠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각각 향후 부족한 소프트웨어 전문인력이 7만명, 10만명이라고 했는데 근거가 매우 궁금하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제시한 과학기술 공약은 그 자체로는 매우 바람직하나, 성취 여부를 판단하는 데 매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학기술인들에게 이런 식의 목표는 막연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면 ‘소프트웨어 강국’이라든지 ‘세계 5위권의 정보기술 강국’과 같은 것이 그러한 목표다.
양강구도를 이루는 두 당에서 제시한 과학기술 공약은 상당히 많은 편이고 비교적 현장 과학자들의 의견청취에 애쓴 흔적이 많이 보였다. 단점은 의견수렴에는 성공했으나 이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해 의견을 제시한 모든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현실성에 의심이 간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 한 가지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운영체제를 개선한다는 공약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Project Based System)의 개선을 지적하고 있다. PBS제도 도입 이전의 정부 출연 연구소 연구원들의 급료는 재정경제부에서 책정한 예산으로 지급되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도입된 PBS제도에서는 정부에서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각 연구소에서 노력하여 외부 과제를 수탁받고 그 외부수탁 연구비로 연구소를 운영하도록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각 연구소에서 알아서 돈을 벌어오고 그 돈으로 적절히 운영을 하는 식이다. PBS제도의 본래 취지는 연구소별, 또한 한 연구소 내에서는 부서별·연구팀별로 경쟁을 극대화해 연구수탁 능력이 부족한 팀이나 부서·연구소는 도태시키고, 반대로 능력 있는 연구원은 능력에 맞도록 급료도 인상해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우수 연구원들은 격려되고 무능한 연구원들은 자연도태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PBS제도 도입 이후 각 연구소 중간간부급 연구원들은 외부 연구비 수탁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해야 하므로 연구 외적인 일에 매우 분주하다. 연구원들 사이에는 외부 연구비 수주를 위해 뛰어다니는 중견 연구원을 일컬어 ‘박사급 앵벌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 제도는 미국과 같이 외부에서 새로운 연구자(미국으로 유입된 외국인 과학자는 전체의 30%를 넘고 있다)가 계속해서 공급될 때나 가능한 일이다. 특히 풍부한 재원으로 유사한 기능의 연구소나 과제를 2중 3중으로 지원하는 미국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자연도태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전략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제안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쪽이 내놓은 공약이다. 그는 앞으로 최고위 과학기술 정책에 시민단체의 참여를 제도화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제도권 과학자들은 시민단체의 참여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워낙 전문화되다 보니 시민단체의 주장이 간혹 사실관계에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박사급 연구자들이 시민단체에 충분히 포진해 있으므로 이런 권위주의적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하간 모든 과학정책에서 국민의 이해와 협조는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이 그렇게 안전하고 깨끗하다면 매일 불야성을 이루는 강남 복판에 소형 핵발전소를 세워라”라는 식의 투박스러운 반론을 억지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일반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명을 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시민단체는 정책이 확정된 뒤 거의 요식행위로서의 공청회에 들러리로 참여하었다. 복잡한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시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제도권 과학자와 과학행정가의 책임이다. 마치 환자에게 의사가 “내가 알아서 최선을 다할 터이니 무슨 병인지, 어떤 치료인지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시라”라는 식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치료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과학정책도 마찬가지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최고의 정책결정 과정에서부터 시민단체를 정식으로 참여시켜 협조와 이해를 구하는 장치는 번거롭지만 매우 바람직한 제도일 것이다. 시민단체 참여 진일보… 내부 자정 시스템 유도 또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 과학자들이 느끼는 행정상의 불만은 정부당국이 과학자들을 철저하게 불신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로 연구비를 과학자의 손에 쥐어주면 제 마음대로 쓰기 때문에 한 가지 한 가지 모두를 철저하게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정부의 입장이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연구비를 집행해도 수십쪽의 규정집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그런데 더 큰 어려움은 연구비 지원기관마다 규정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어떤 지원기관에서는 교수들의 해외출장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교수들이 학생들 데리고 해외로 놀러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교수 10여명과 학생 수십명이 참여하는 수억원대 과제에 해외 국제학술회의 참여가 완전히 봉쇄되는 경우도 있다. 연구책임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연구가 끝날 즈음 하는 연구비 정산이다. 잘못 집행된 연구비는 환수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주 망신까지 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비 감사는 연구비 집행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뒤에도 다시 실시될 수 있다. 연구소 감사, 과학기술부 감사, 평가원 감사, 또 국정감사로 줄줄이 이어진다. 하지만 연구내용에 대한 평가는 이에 비하면 매우 약한 편이다. 한 연구과제의 전체 활동을 100이라 잡으면 연구진행에 60, 연구비 집행에 30, 나머지 10이 평가로 느껴질 만큼 연구결과에 대한 부담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연구에 집중해야 할 연구원은 영수증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으며 연구결과에 대한 활용이나 책임은 예산심사가 끝나면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장밋빛 공약 이전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과학기술자를 신뢰하는 일이다. 물론 어느 집단이든지 엉터리가 일정부분 있지만 이는 내부의 자정작용을 통하여 걸러지도록 해야 한다. 실력 없는 과학자를 정부가 이런저런 복잡한 행정적 그물망을 사용해 제거하려는 작업은 그 취지에 비해 묵묵히 연구에만 몰두하는 과학자들에게 번잡함과 좌절감만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조환규/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사진/ 과학자들은 장밋빛 공약보다 학자적 양심에 대한 신회를 바란다. 연구비 감사가 연구를 가로막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겨레21)
양강구도를 이루는 두 당에서 제시한 과학기술 공약은 상당히 많은 편이고 비교적 현장 과학자들의 의견청취에 애쓴 흔적이 많이 보였다. 단점은 의견수렴에는 성공했으나 이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해 의견을 제시한 모든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수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현실성에 의심이 간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 한 가지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운영체제를 개선한다는 공약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Project Based System)의 개선을 지적하고 있다. PBS제도 도입 이전의 정부 출연 연구소 연구원들의 급료는 재정경제부에서 책정한 예산으로 지급되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도입된 PBS제도에서는 정부에서 급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각 연구소에서 노력하여 외부 과제를 수탁받고 그 외부수탁 연구비로 연구소를 운영하도록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각 연구소에서 알아서 돈을 벌어오고 그 돈으로 적절히 운영을 하는 식이다. PBS제도의 본래 취지는 연구소별, 또한 한 연구소 내에서는 부서별·연구팀별로 경쟁을 극대화해 연구수탁 능력이 부족한 팀이나 부서·연구소는 도태시키고, 반대로 능력 있는 연구원은 능력에 맞도록 급료도 인상해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다. 겉으로만 본다면 우수 연구원들은 격려되고 무능한 연구원들은 자연도태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PBS제도 도입 이후 각 연구소 중간간부급 연구원들은 외부 연구비 수탁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해야 하므로 연구 외적인 일에 매우 분주하다. 연구원들 사이에는 외부 연구비 수주를 위해 뛰어다니는 중견 연구원을 일컬어 ‘박사급 앵벌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 제도는 미국과 같이 외부에서 새로운 연구자(미국으로 유입된 외국인 과학자는 전체의 30%를 넘고 있다)가 계속해서 공급될 때나 가능한 일이다. 특히 풍부한 재원으로 유사한 기능의 연구소나 과제를 2중 3중으로 지원하는 미국과는 차원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자연도태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전략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제안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쪽이 내놓은 공약이다. 그는 앞으로 최고위 과학기술 정책에 시민단체의 참여를 제도화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제도권 과학자들은 시민단체의 참여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이 워낙 전문화되다 보니 시민단체의 주장이 간혹 사실관계에서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박사급 연구자들이 시민단체에 충분히 포진해 있으므로 이런 권위주의적 염려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하간 모든 과학정책에서 국민의 이해와 협조는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이 그렇게 안전하고 깨끗하다면 매일 불야성을 이루는 강남 복판에 소형 핵발전소를 세워라”라는 식의 투박스러운 반론을 억지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일반인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명을 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시민단체는 정책이 확정된 뒤 거의 요식행위로서의 공청회에 들러리로 참여하었다. 복잡한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시민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제도권 과학자와 과학행정가의 책임이다. 마치 환자에게 의사가 “내가 알아서 최선을 다할 터이니 무슨 병인지, 어떤 치료인지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시라”라는 식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치료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과학정책도 마찬가지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최고의 정책결정 과정에서부터 시민단체를 정식으로 참여시켜 협조와 이해를 구하는 장치는 번거롭지만 매우 바람직한 제도일 것이다. 시민단체 참여 진일보… 내부 자정 시스템 유도 또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 과학자들이 느끼는 행정상의 불만은 정부당국이 과학자들을 철저하게 불신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예로 연구비를 과학자의 손에 쥐어주면 제 마음대로 쓰기 때문에 한 가지 한 가지 모두를 철저하게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정부의 입장이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연구비를 집행해도 수십쪽의 규정집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그런데 더 큰 어려움은 연구비 지원기관마다 규정이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어떤 지원기관에서는 교수들의 해외출장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교수들이 학생들 데리고 해외로 놀러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교수 10여명과 학생 수십명이 참여하는 수억원대 과제에 해외 국제학술회의 참여가 완전히 봉쇄되는 경우도 있다. 연구책임자들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연구가 끝날 즈음 하는 연구비 정산이다. 잘못 집행된 연구비는 환수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주 망신까지 당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비 감사는 연구비 집행이 끝난 지 4년이 지난 뒤에도 다시 실시될 수 있다. 연구소 감사, 과학기술부 감사, 평가원 감사, 또 국정감사로 줄줄이 이어진다. 하지만 연구내용에 대한 평가는 이에 비하면 매우 약한 편이다. 한 연구과제의 전체 활동을 100이라 잡으면 연구진행에 60, 연구비 집행에 30, 나머지 10이 평가로 느껴질 만큼 연구결과에 대한 부담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연구에 집중해야 할 연구원은 영수증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으며 연구결과에 대한 활용이나 책임은 예산심사가 끝나면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장밋빛 공약 이전에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과학기술자를 신뢰하는 일이다. 물론 어느 집단이든지 엉터리가 일정부분 있지만 이는 내부의 자정작용을 통하여 걸러지도록 해야 한다. 실력 없는 과학자를 정부가 이런저런 복잡한 행정적 그물망을 사용해 제거하려는 작업은 그 취지에 비해 묵묵히 연구에만 몰두하는 과학자들에게 번잡함과 좌절감만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조환규/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