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쭉정이 농사

437
등록 : 2002-12-04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때이른 추위로 들녘은 벌써 황량하다. 둥글게 또는 네모지게 말아올린 볏짚도 소 키우는 농가로 옮아간 지 오래고 잦은 가을비와 추위에도 어찌어찌 갈아놓은 보리논이 가지런한 이랑을 탄다.

김장배추 절여놓은 커다란 다라이가 우리집 마당을 채우고 동네 가게 아줌마도 절인 배추 헹구어내느라 찬바람에 얼굴이 꽁꽁 얼었다. 앞당겨들 김장 채비 차리나 보다. 해마다 똥값된 배추 팔아먹기 힘들어 올해는 먹을 만치만 배추를 갈았더니 값이 솔찬하다고(괜찮다고) 마실 오신 지산 양반과 아버님 아쉬운 혀를 찬다.

며칠 전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금을 마련하느라 하루종일 밥장사 벌여 올린 수익 500여만원이 성에 안 차 콩닥콩닥하는 내게 어머니는 “오메오메 일년 내 뼈빠지게 농사지은 값을 하루에 벌었어야. 20마지기 쌀농사가 막내딸 서너달 월급만치도 안 된당께”라며 한숨을 섞는다.

농약값 30만원, 비료값 20만원, 트랙터값 70만원, 가래삯(콤바인) 80만원, 소작료 열두섬값 빼고 나니 쌀농사는 쭉정이만 남는다. 더구나 올해 소출이 지난해에 비해 12가마나 줄었다니 자식이며 사돈까지 챙겨 보내던 쌀인심을 줄일밖에….

장맛비에 고추농사도 재미 못 보고 쌀농사야 남는 것 생각 않고 농사꾼의 사명감으로 뼈빠지게 지어봤자 이것 떼고 저것 떼면 농사만 지어갖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가을일 마치자마자 남의 일 다니며 한두달 품 팔아 번 돈 76만원 받아 홀딱 밀린 콤바인삯 주고 나니 몇천원 남는 것이 요즘의 농사다.

아폴로 눈병만큼이나 전염성이 강한 독감에 걸려도 아버님은 일거리만 있으면 하루품 팔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밤마다 ‘끙끙’ 앓은 소리를 해대다가도 컴컴한 새벽녘부터 일 나갈 채비 차리는 사람들로 마을회관 앞이 수선스럽다. 요즘 같으면 약값이 더 드니 남의 일 가지 마시라고 말려도 농사꾼한테 겨울이 농한기라는 것은 옛말이라며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과 새벽바람을 맞으신다.


농가경제가 엉망이니 상가도 비상이다. IMF 때도 이러진 않았다는 서점주인 미자씨는 지금이 한창 나락 팔아 빚 갚고 소비할 때인데 올해는 읍내에 농민들이 줄었다며 걱정에 애가 단다. 농협 직원들은 벌써부터 농가부채 상환 독촉할 일이 까마득해 보인다.

전국농민대회 이후 농민회·쌀대책위 등 농민단체들은 ‘쌀값 보장’을 위한 차량시위를 벌이며 자치단체와 협상 중인가 보다. 농민회 사무국장집인 고추방앗간 앞은 쌀값 보장, WTO 재협상, 미국 반대의 문구가 투쟁 분위기를 그려낸다. 거리 곳곳엔 농민들이 몰고 가는 트럭에 쌀값 보장의 깃발이 펄럭이고….

올해는 소출이 적어 쌀이 천덕꾸러기 신세는 면한 듯 보여도 쌀농사 포기를 강요하는 WTO 협정을 개정하지 않는 한 되풀이되는 농민들의 한숨과 추운 겨울의 고단함을 줄일 수 없지 싶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영광댁 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