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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취의 공포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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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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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메커니즘 이용한 신경 스테로이드 마취제… 뇌 손상·혈압 저하 없이 비REM수면 유도

몇년째 전신마비와 구음장애·정신장애 등에 시달리는 손아무개씨. 목 뒷부분에 생긴 지방종을 없애는 단순한 수술을 받다가 파킨슨병이라는 중병을 앓게 됐다. 정맥주사로 마취유도제 펜토탈과 근육이완제 석시닐콜린을 맞고 나서 인공흡입식으로 전신 흡입마취를 해 수술을 받은 뒤 손씨는 뇌손상을 입고 말았다. 신경성 인두와 알레르기성 기관지염 등의 병력이 있는 손씨의 병력에 관심을 두지 않은 의료진의 과실로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됐다. 0.1% 미만이라는 전신마취의 후유증, 그 불행이 누구에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마취제는 인간생활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발명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마취가 없는 현대 의학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마취제를 쓰지 않으면 환자들이 현대의학의 진수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취제를 쓰지 않고 이를 뽑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봉곳한 가슴을 만드는 성형수술에도 마취제는 필수적이다. 수술대에 눕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통·진정·무의식의 전신마취 등 마취제의 혜택을 받는다. 이렇게 마취제는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행복 지수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게 사실이다.

죽음 직전의 상태로 의료사고 주요 원인


사진/ 환자는 전신마취를 두려워한다. 마취제가 거의 죽음 직전의 상태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김종수 기자)
하지만 의료사고의 상당수가 마취제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단한 마취일지라도 위험 부담이 따른다. 마취전문의가 마취상태에 있는 환자를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수술에서 전신마취는 정맥을 통한 마취유도제가 투입된 다음 흡입가스를 통해 마취가 유지된다. 마취제는 이산화질소·산소·할로탄 등의 혼합가스를 이용한다. 이때 가장 안전한 마취제로 알려진 물질이라 해도 25만분의 1의 사망률을 보인다. 마취제가 환자를 거의 죽음 진전까지 몰고 가기에, 잠에 빠질 정도의 양보다 적은 양의 마취제를 조금만 더 넣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마취유도제로 쓰이는 펜토탈은 호흡기감염 증상이 있는 환자나 기관지천식 환자 등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기도에 종양이 있는 환자라면 약물투여 뒤에 무의식 상태에서 기도폐쇄를 유발할 수 있다. 거기에 근육이완제를 더 넣으면 기도폐쇄를 심각하게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합병증으로는 머리 동작이나 인두, 기관지 자극 등으로 후두경련이나 기관지경련이 일어나 저산소증이 생길 수 있다. 심지어 폐의 확장부전에 따라 급격히 맥박이 빨라지고 혈압과 체온이 떨어지는 허탈(虛脫)을 일으켜 심장박동을 정지시키는 경우도 있다.

마취제의 끔찍한 ‘효과’는 지난 10월 러시아 특수부대의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진압과정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진압작전에서 인질 119명의 목숨을 빼앗은 가스가 마약성분의 초강력 마취제인 ‘펜타닐’과 ‘할로세인’ 등의 혼합물로 밝혀졌다. 모르핀보다 수백배 이상 효능이 뛰어난 펜타닐은 지난 1968년 정맥마취제로 처음 쓰인 뒤 심장병이나 장기이식 등 어려운 수술에 쓰여왔다. 펜타닐은 암환자를 위한 강력한 진통제나 마약 대용으로 유통되기도 한다. 할로세인은 마취 효과가 오랜 시간 지속되도록 유도한다. 펜타닐이 순간적으로 뇌의 활동을 정지시키면 할로세인이 무의식 상태에 빠져들도록 한다.

사진/ 최근 마취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면을 유도하는 모습. (김종수 기자)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질병 치료에 크게 이바지한 마취제. 기원은 2세기께 중국의 명의 화타로 거슬러올라간다. 동양의학에서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는 화타는 ‘마비산’이라는 마취제를 외과수술에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때론 환자에게 가벼운 뇌진탕을 일으키거나 질식을 유도해 수술을 하기도 했다. 때죽나무 열매나 잎 속에는 사포닌이 주성분인 마취성분이 들어 있고, 원뿔달팽이의 독은 먹이를 마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강력한 마취 효과를 낸다. 두꺼비의 독이나 양귀비, 코카인 등도 마취제로 쓰였다.

현대적 의미의 마취제는 1846년 미국 보스턴의 매사추세츠병원에서 솜에 묻힌 에테르를 종양환자가 흡입하도록 유도한 뒤로 대중화됐다. 마취제가 수술실에서 150여년 전부터 널리 쓰였지만 작용기전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당연히 마취는 전적으로 마취전문의의 경험과 기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취전문의라고 해도 개별 환자의 상태를 정밀하게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수술 전에 눈으로 치아와 편도선 상태, 귀로 심잡음과 호흡음, 촉진으로 맥박 상태, 심전도검사로 교감신경의 긴장성 등을 파악해 마취를 하더라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취전문의는 나이와 몸무게, 키, 간·신장 기능 등을 기초로 초기 약 투입량을 결정한다. 그것만으로 투입량을 결정하는 것은 부족하다. 유전적인 면은 물론이고, 며칠 전 먹은 음식물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취를 앞둔 환자가 감자나 토마토·가지·무 등을 먹었다면 마취제의 작용을 현저히 지연시킨다. 이들 음식물에는 동물이나 곤충·곰팡이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천연 살충물질인 ‘솔라내슈스 글리코알칼로이드’(SGAs·solanaceous glycoalkaloids)가 들어 있다. SGAs는 요리를 해도 사라지지 않고, 적은 양을 먹더라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취제와 근육이완제의 분해를 지연시킨다. 마취제를 분해하는 효소의 활성화를 방해하기에 마취효과가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 마취제의 작용기전에 관한 의문도 서서히 풀리고 있다. 영국 런던 임페리얼대학의 닉 프랭크스 교수팀은 마취제가 깊은 수면을 일으키는 자연적인 과정을 모방하면서 효과를 낸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실험용 쥐의 행동연구와 분자영상기술을 이용해 마취제의 수면 유도작용이 온도 조절과 호흡 같은 기초과정을 조절하는 시상하부 일부분인 조면유두체핵(Tuberomammillary Nucleus, TMN)이라는 국소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을 찾아냈다. 마취제들은 조면유두체핵 안에 있는 도넛 모양의 세포막 단백질인 GABA-A라는 특정 신경전달 물질을 제어해 진정효과를 보인다. 마취제분자들이 GABA-A수용체에 결합하면 수용체들은 신경세포가 다른 신경으로 전기신호를 보내는 작용을 멈추는 것이다.

음식물도 영향 끼쳐… GABA-A수용체의 비밀

이런 사실은 무의식상태와 GABA-A의 연결고리를 찾는 데로 이어지고 있다. 스코틀랜드 던디대학의 신경생리학자 제러미 램버트 교수팀은 GABA-A의 수용체에 돌연변이를 일으킨 개구리알을 주입해 마취제에 전혀 반응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마취제를 둘러싼 GABA-A수용체 이론이 증명된 셈이다. 이에 따라 GABA-A수용체를 조절해 마취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마취의 작용기전을 조절하는 안전한 마취제 개발의 단서는 성호르몬의 대사물질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난소의 황체에서 분비되는 강력한 수면 유도물질인 프로게스테론의 스테로이드 분해물질을 고농도로 처리하면 안전한 마취제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마취제는 메스꺼움·구토 등의 가벼운 증상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호흡부전이라는 심각한 부작용도 있다. 전신마취로 인한 기억력 감퇴를 겪는 사람이 있지만 임상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다. 마취제가 수면을 유도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부작용이 거의 없는 새로운 마취제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술 뒤 피로와 후유증을 줄이면서 숙면상태인 비REM수면을 정확하게 유도하는 물질을 디자인하면 된다. 신경스테로이드는 정맥주사형 마취제의 한계를 극복해 안전성이 뛰어나고, 혈압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무의식을 경험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최면이 중추신경계의 화학물질에 영향을 끼쳐 통증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여기며 마취제 대신 최면술을 이용하기도 한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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