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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포르노 뒷면에 SF가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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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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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 소설의 지평을 넓힌 <플레이보이>… 미래 사회에 대한 지적 체험의 기회 제공

사진/ 블레이보이SF 걸작선 1·2,필립K. 딕 외 지음, 한기찬 옮김, 황금가지 펴냄, 각 권 9천원.
<플레이보이> 한국판을 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돼왔다. <플레이보이>는 미국의 난잡한 성인잡지 가운데 하나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일 만큼 포르노성 이미지가 뚜렷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잡지에 쿠바 혁명의 주역인 카스트로의 인터뷰가 실리거나 천재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물리학 개론과 같은 글이 게재되는 건 어찌된 영문일까

“상상력, 혁신과 대담성은 언제나 그 잡지의 장사 수완이었다. 그러니 그 잡지가 그렇게 많은 일류 작가들을 끌어들인 것도 당연하다. 작가들 역시 잡지가 바라는 바에 충실히 따라주었다.”

창간 때부터 쟁쟁한 작가들이 연재


10년 넘게 <플레이보이>의 소설부문 편집장을 맡아온 앨리스 K. 터너의 말에 시비를 걸기는 곤란하다. 예컨대 <플레이보이>는 1953년 처음 발행될 때부터 과학소설을 즐겨 게재해왔고, 성인 독자를 겨냥해 작가에게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줬다. 터너가 그동안 연재한 과학소설 가운데서 시대별·작가별 대표작을 뽑아낸 <플레이보이 SF 걸작선>의 24명 작가는 쟁쟁하다. 영국 작가 제임스 그레이엄 발라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태양의 제국>과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이 만들어 컬트의 지위를 얻게 해준 <크래시>의 원작자고, 아서 C. 클라크는 20세기 최고의 과학영화로 칭송받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이 된 단편 <보초>를 썼으며,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이 영화를 공동제작했다. 또 도박장을 다룬 사실적인 소설 <허슬러>와 <컬러 오브 머니>(이들 작품은 폴 뉴먼과 톰 크루즈가 각기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졌다)의 월터 테비스, 리들리 스콧 감독에게 불멸의 걸작을 헌사케 해준 <블레이드 러너>와 올해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들어 크게 히트한 블록버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소설을 제공한 필립 K. 딕 등이다. 뜻밖의 인물도 있다. 할리우드의 영화배우이자 코미디언으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스타덤에 오른 빌리 크리스털이 <지구 방송국 찰리>란 작품에서 텔레비전에 빠져 인생을 망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제 <플레이보이>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6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쓴 소설들 속으로 들어가보자. 공상과학(SF)의 걸작 영화들이 대체로 첨단 과학이 수놓는 미래를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그리는 근거들을 하나씩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수록작 <화성연대기>(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1967년)에는 미모의 여배우, 시인, 사냥꾼 등 일곱명의 일행이 화성의 죽어 있는 도시를 탐험하는 이야기다. 아주 멋지게 단장된 도시에 이르자 일행은 화성인들이 몽땅 빠져나간 까닭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한다. 각자 흩어져 도시를 둘러보던 이들은 자기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을 기막히게 현실화해주는 기능과 맞닥뜨린다. 시인은 각종 계기판과 핸들이 붙어 있는 기계장치 안에 탑승을 하는데, 이 기계는 질주할 줄만 알지 멈추지를 않는다. 가속도가 붙어 엄청난 속도로 달릴 때쯤 마주오는 또 다른 물체와 충돌해버린다. 죽음이다. 그런데 이건 완벽한 무(無)와 파괴로의 추락을 경험하게 해주는 실제나 다름없는 가상현실이다. 시인은 파멸의 쾌감에 빠져 수백번이나 산산조각났다가 다시 살아나는 짓을 되풀이한다. 늙어가는 신세를 한탄하는 여배우에겐 젊음을 돌려주고, 화력 좋은 무기를 좋아하는 사냥꾼에게는 가공할 무기를 안겨준다. 곧 누군가 깨닫는다. “이런, 이곳은 지옥이라고. 화성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건설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곳을 빠져나간 거요.”

사진/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원작자는 필립K.딕이다. 그의 마지막 단편을 이 걸작선에서 만날 수 있다.
필립 딕이 발표한 마지막 단편 <냉동여행>(1980년)은 인간의 기억을 임의로 조작함으로써 야기되는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과 정신분열이라는 그의 오랜 주제를 다시 한번 멋지게 보여준다. 10년간 우주비행을 위해 냉동 보존탱크 속에 잠든 예순명의 상태를 점검하던 우주선의 컴퓨터는 한 인물이 덜 냉동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식만 깨어 있는 상태인데, 달리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냥 방치한 채 목표한 행성에 이를 때쯤이면 그는 식물인간이 될 처지다. 그래서 우주선은 그에게 잊힌, 과거의 유쾌한 기억을 공급해 그의 정신감각을 유지시키기로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기억은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는 죄의식과 결합해 극심한 혼돈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우주선은 뭔가 잘못돼 간다는 걸 깨닫는다. “이 친구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격자처럼 엮어 하나로 통합해놓았군. 아무리 유쾌한 기억을 넣어줘도 곧장 오염시키고 말아.” 우주선은 그를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식된 기억을 지우고 소원 성취 감각을 끊임없이 재순환한다. 그 결과는 더욱 큰 악몽이 그에게 현실화된다. 필립 딕은 재현된 기억과 우주선 안의 현실을 교차 편집식으로 긴박하게 펼쳐나간다.

디스토피아의 근거들… 풍자의 재미 만끽

재치 있게 전개되는 재미있는 풍자도 제법 많다. <원숭이 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커트 보니거트 2세, 1968년)는 지구의 인구가 170억명에 이르는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세계 정부는 인구 과잉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곳곳에 설치된 윤리자살센터에서 멋진 미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윤리적 자살을 택하도록 권장하거나 남녀의 아랫도리 감각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피임약을 강제 복용토록해 성욕 자체를 없애는 식이다. 그런데 피임약 복용을 거부하는 ‘건달’이 나타나 경찰의 추적을 피해가며 섹스의 즐거움을 전파하는 소동이 벌어진다. 또 <고스트의 기준>(윌리엄 텐, 1994년)은 인간과 바다가재 변형체인 두 생물이 식량이 부족한 우주 난파선에 갇힌 상황에서 시작한다. 선택할 방법이라고는 구조선이 오기 전에 모두 죽거나 한 생물을 먹이삼아 누군가 혼자라도 살아남는 것이다. 고도의 지적 존재인 이들은 컴퓨터를 심판인 동시에 패자의 처형자로 삼기로 하고 낱말게임을 벌인다. 결국 바다가재 변형체가 게임에서 지고 인간이 살아남는데, 그는 악의적인 식인행위로 재판에 회부된다. 컴퓨터 역시 교사범으로 간주돼 재판을 받는다. 흥미로운 건 기발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재판과정이고 이를 통해 도대체 정의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게 하는 방식이다.

영국의 과학소설 평론가 브라이언 올디스는 과학소설이란 “우주에서 인간의 정의와 그 위상을 혼란스럽지만 진보하는 지식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라고 그 지위를 치켜세운 바 있는데, 1998년 출판된 이 모음집은 이 말과 어울리는 듯하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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