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과 공동체를 존중한 고 김광석에 대한 추억… 그의 박스 세트를 듣는 ‘486 음악평론가’의 감상
김광석의 음반이 또 나왔다. 세장의 CD와 한장의 DVD를 패키지로 묶어 박스 세트 포맷으로 나왔다. “보브 딜런 엔지니어의 리마스터링”이라는 홍보 문구처럼 음질도 새로 손봐서 나왔다. 디스플레이를 해도 좋을 듯한 하드보드 케이스를 열면 포토 에세이 형식의 부클릿을 만날 수 있다. 그가 생전에 쓴 일기와 사진들, 그리고 명사들이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다른 음반으로 들을 수 있는데 왜 또 새로 발매했는가’라고 물으면 이는 첫 번째 CD와 두 번째 CD에만 해당한다고 답변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CD는 아직까지 발표되지 않은 것들을 모았고, 두 번째 CD도 미발표 레코딩이 몇 트랙 들어 있다. 물론 DVD 역시 발표되지 않은 것들을 모았다. 그래서 성탄절과 연말연시에 마땅히 선물로 고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 종합선물세트로 적격일 것이다(다들 알겠지만 선진국들에서 박스 세트가 연말에 많이 나온다. 옛날의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처럼). 직접 구입하든 선물로 받든 이 음반을 손에 들면 이런저런 상념에 잠길 것이다. 상념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므로 나도 나의 개인적 상념으로 이 글의 나머지를 메우고자 한다.
‘패키지 김광석’ 마주한 이들의 상념들
한 10년쯤 전인 것 같다. 서울 주변의 한 위성도시에서 막 신혼 살림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하루는 집 근처 슈퍼마켓(요즘의 ‘마트’)에 갔다가 누군가 뒤에서 “형!”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일순 당황했다. 학교 주변에서는 많이 듣는 말이지만 집 근처에서는 거의 듣지 못하는 소리라서 그런 것 같았다. 뜻밖에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고(故) 김광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특유의 파안(破顔)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처럼 카트를 끌고 있었다. 그때 그는 막 뜨려는 찰나였다. <기다려 줘> <사랑했지만> 등이 대중가요로, 이른바 발라드로 히트한 시기였고, 단독 라이브 공연을 통해 ‘소극장의 스타’가 되려는 시점이었다(나와 취향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첫 번째 CD를 듣기 바란다. 김형석이 베이비 복스 등을 통해 히트한 곡을 쓰기 전에는 어떤 곡을 썼는지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의 이야기를 주절주절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센스도 없는 짓이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나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고, 그는 한때 같은 꿈을 꿨지만 지금은 ‘직업인’, ‘생활인’이 돼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직업가수, 대중가수가 돼 버렸고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때는 이런 단정이 어리석고 건방지다고 자각하지 못했다.
빙빙 돌려 말한 셈인데 그 무렵 나 같은 사람의 귀에 김광석이 히트한 노래들은 상업적 가요 이상으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들으면 꼭 노래방 반주 같은 키보드나 오케스트라로 편곡된 소리 위에서 사랑을 외치는 그의 모습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낯설었다. 이건 꼭 가사나 편곡의 문제만은 아니다. 뭐라고 할까…. 육성을 먼저 들어본 사람의 목소리가 음반에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면 좀체 진짜로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음반에 녹음된 목소리가 가짜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직접 기타를 치며 육성으로 노래부르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에코를 건 기타 소리까지 이상하게 들렸다. 소극장 공연에도 몇번 찾아갔지만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 분위기, 음악보다는 재담이 앞서는 분위기에 낯설어한 기억도 있다(이 점은 요즘 내가 소극장 공연에 가기 싫어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어쨌든 이 분위기에 젖으려면 두 번째 CD를 집어들면 된다.
그에 관한 소소한 기억을 떠올리는 까닭
그래서 1년 전쯤 김광석 트리븃 음반이 나왔을 때 나는 최종적으로 김광석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 덕담으로 하면 ‘산 디지털이 죽은 김광석을 부활시켰다’고 말할 음반이고, 험담으로 하면 ‘죽은 사람 가지고 장난치나’는 말이 나올 음반이었다. 혹시나 그 음반을 못 들어본 사람을 위해 설명한다면, 이 음반에 실린 음악들은 김광석이 생전에 녹음한 목소리에 지금 활동하는 가수들의 목소리를 덧입힌 버전이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만든 작품들 가운데는 간혹 ‘진짜보다 더 진짜 같다’는 평을 할 만한 작품들이 없지는 않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경우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괜히 ‘자기 혼자 진짜 김광석을 알고 있다고 잘난 척한다’는 반응을 보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이런 생각은 그 시절 나의 굳고 굳은 머리의 소산이다. 나와 김광석의 관계가 속까지 털어놓을 정도로 흉허물 없는 관계는 아니었고, ‘노래운동’이라는 느슨한 조직에서 어쩌다 지나가다 만난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동석해 몇 마디 나눈 일이 있을 뿐 단둘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인생과 음악을 논한 적은 없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만난 나의 지인으로부터 그가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러면 도대체 앞에서 “한때 같이 꾼 꿈”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번 박스 세트의 세 번째 CD의 마지막 트랙은 <타는 목마름으로>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김광석은 민중후보의 유세장인 동숭동 대학로에서 이 곡을 불렀다. 나는 뒤에서 기타를 쳤다. 물론 ‘사람이 없다’고 선배가 불러서 한 일이었다. 내 실력에 무슨…. 그때 그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진지했다. 특히 마지막에서 고음을 길게 끌며 절창할 때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이번 박스 세트에 이 곡이 CD와 DVD에 모두 수록된 것이 개인적으로 반갑다. <친구>와 <녹두꽃> 같은 민중가요가 나쁜 음질로 수록된 것도 그의 진짜 모습에 접근하는 것 같아 반갑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1980년대의 꿈’을 다시 말하는 것인가. 김광석의 유작이 돼버린 <일어나>도 그런 뜻일까. 그렇지만 나는 그것 이상을 말하고 싶다. 아니면 1980년대의 꿈이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 나는 아직 정확한 언어를 찾지 못했다. 대중문화와 변혁운동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음에도 양자가 공존한 시대를 살아온 자들의 어떤 꿈이라고나 할까.
그에게 음악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물론 꿈은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꿈이다. 아까 내가 직업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1990년대 초의 김광석은 이런 꿈을 찾기 위해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선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소극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나마 그 꿈을 실현했다. 그 꿈이 극장을 벗어나 광장으로 향할 수 없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일기를 읽으면 그때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나 같은 평론가란 그저 그 같은 인물이 먼저 실천에 옮긴 궤적을 따라 그것을 언어로 기록하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진실은 기록되지 않으며 단지 기록의 틈새에서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일 뿐이다.
음악을 들으면 그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그만한 가수도 없었네’라는 통속적 그리움뿐 아니라 잃어버린 꿈에 대한 그리움이다. ‘결연한 투쟁’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을 넘어 개성과 공동체가 모두 존중되고 음악이 생활인 어떤 상태에 대한 꿈이었을까. 어쨌든 그것들은 “저만치 멀어져간다”. 아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죽음도 저만치 멀어져갔으면 좋으련만….
신현준/ 대중음악평론가


사진/ 김광석에 대한 그리움은 잃어버린 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김광석은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자상한 아빠였다.

사진/ <친구><녹두꽃><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는 김광석을 이제서야 만나게 됐다. 우리가 놓쳐온 '발라드 가수' 김광석의 다른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