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먼지 털고 환생하는 출토복식의 세계… 350년 전 조선의 꼬마는 무엇을 입었을까
한국복식사를 연구하는 박성실 교수(단국대·전통의상학과)는 몇년 전부터 무덤 발굴 때 조그만 관만 나오면 혹시 어린이가 아닐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관뚜껑을 열어 보면 번번이 몸집이 작은 여성의 주검이었다. 전통적 유교 윤리관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손을 불효자로 여겨 정상적인 장례절차 없이 화장이나 공동묘지에 매장하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조선시대 어린이들이 실제 입은 옷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접지 않았다.
시대를 증언하는 옷… 취향과 유행 보여줘
지난해 11월 마침내 기회가 왔다.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 광사리 선산에서 이장작업을 하던 해평윤씨 문중에서 연락이 왔다. 달려가 보니 작은 소나무 목관과 흰 광목에 싸인 주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물에 젖어 얼어붙은 옷들을 손바닥 체온으로 녹이며 하나씩 조심조심 벗겨 나갔다. 어른의 중치막(옆이 트인 포 종류의 겉옷)과 멱목(주검 얼굴을 덮는 천) 아래로 편안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어린아이 얼굴이 나타났고, 곧게 탄 가르마와 어제 땋은 듯한 검은 머리채가 남아 있었다. 수백년 전 어린이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해골의 치아 발달과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토양의 꽃가루 분석 등을 종합한 결과 아이는 300~350년 전 5월의 어느 따뜻한 봄날 5살의 나이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무엇보다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여기서 나온 옷가지들이다. 아이는 어머니 것으로 보이는 장옷을 요처럼 깔고 아버지의 중치막을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었다. 어린 자식을 차가운 땅 속에 묻으며 애통해하던 부모의 심정이 나타난 대목이다. 발굴된 복식 가운데 시대 변화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것은 중치막 5점. 임진왜란 이후부터 등장한 중치막은 소매모양·옆트임 길이 등 생김새가 수십년 단위로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아이가 입은 중치막을 비롯해 어른 것들 모두 겨드랑이 아래부터 사다리꼴 무(품에 여유를 줘서 활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덧댄 천)를 달았고 중간부분에 트임을 줬다. 박 교수는 “17세기 말부터는 중치막에서 무가 사라지고 겨드랑이 15cm 아래부터 트임이 들어간다. 아이가 숨진 시기는 1650년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아이의 중치막은 구한말 꼬마들이 색색이 해입은 오방장두루마기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입은 중치막은 아버지 것으로 추정되는 어른용과 달리 길과 깃·소매·무·섶 등 부분부분 색상이 다르게 남아 있다. 아이에게는 여러 천을 이어 알록달록 채색옷을 입힌 것이었다. 단국대는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이 어린이 미라와 유품들을 모아 14일까지 ‘350년 전 소년미라와 가족사랑전’을 연다(문의 02-709-2187~8). 지석도 비석도 표지도 없는 무덤의 경우 여기서 나온 ‘출토복식’은 시대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물증이다. 각종 과학적 조사 자료가 되기도 할뿐더러 옛 사람들의 개인적 취향과 시대적 유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요즘엔 장례 때 삼베로 ‘수의’를 따로 지어 입히지만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평소 입은 생활복을 그대로 입혀 묻었기 때문이다. 이런 매장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품이 넉넉한 옷 대신 몸에 꼭 맞는 옷이 유행하면서 ‘수의용’ 옷들을 따로 만들면서부터다. 일제시대엔 각종 물자가 부족해 삼베 일색이 됐고, 오늘날엔 오히려 똑같은 모양의 삼베수의가 수백만원을 호가하며 팔리는 상황이 돼버렸다. 현대적 미감 압도하는 작품도 수두룩
수백년 동안 무덤 속에서 쌓인 먼지를 털고 나오는 옷들은 옷주인의 개성과 당시의 고급스러운 안목이 녹아 있는 모양과 직물이 많다. 한국민속박물관 김영재 학예연구사는 “이응해 장군(1547~1626) 묘에서 나온 단령에는 리본을 입에 물고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새 문양이 있을 만큼 옛 사람들의 표현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다. 출토복식은 오늘날 직물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고 말했다. 수백년 전 유행한 스타일이 현대적인 미감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다. 16세기 원주원씨 무덤에서 나온 치마는 앞부분에 덧주름을 잡아 걸을 때 앞자락은 살짝 들리고 치마 뒷자락은 잘잘 끌리도록 했다. 패션디자이너 이영희씨는 이 치마의 스타일을 원용한 작품을 파리 패션쇼에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런 출토복식이 우리 곁에 가장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TV 사극에서일 것이다. 한국방송 사극고증 자문위원이기도 한 박성실 교수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텔레비전 사극 배우들은 오늘날 우리가 입고 있는 한복을 그대로 입고 연기했다”고 전한다. <용의 눈물>에서 태종이 관복(단령) 안에 어깨소매 길이의 답호를 입거나, 조선 전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여자들이 길이가 긴 저고리를 입는 것, 덕수궁수문장 교대식 때 수문장들이 원피스 모양의 겉옷 첩리를 착용하는 것 등은 출토복식의 성과가 쌓인 성과다.
‘이 세상에서 입는 마지막 옷’이자 ‘저 세상에서 처음으로 입는 옷’ 산 사람들의 염원과 죽은 이의 혼이 담겨 묻힌 출토복식은 오늘날 이렇게 ‘부활’하고 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350여년 전 땅 속에 묻힌 아이(오른쪽)는 어른의 중치막을 덮고 채색옷을 입고 있었다(왼쪽).
무엇보다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여기서 나온 옷가지들이다. 아이는 어머니 것으로 보이는 장옷을 요처럼 깔고 아버지의 중치막을 이불삼아 덮고 누워 있었다. 어린 자식을 차가운 땅 속에 묻으며 애통해하던 부모의 심정이 나타난 대목이다. 발굴된 복식 가운데 시대 변화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것은 중치막 5점. 임진왜란 이후부터 등장한 중치막은 소매모양·옆트임 길이 등 생김새가 수십년 단위로 끊임없이 변해왔기 때문이다. 아이가 입은 중치막을 비롯해 어른 것들 모두 겨드랑이 아래부터 사다리꼴 무(품에 여유를 줘서 활동을 편하게 하기 위해 덧댄 천)를 달았고 중간부분에 트임을 줬다. 박 교수는 “17세기 말부터는 중치막에서 무가 사라지고 겨드랑이 15cm 아래부터 트임이 들어간다. 아이가 숨진 시기는 1650년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아이의 중치막은 구한말 꼬마들이 색색이 해입은 오방장두루마기의 기원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가 입은 중치막은 아버지 것으로 추정되는 어른용과 달리 길과 깃·소매·무·섶 등 부분부분 색상이 다르게 남아 있다. 아이에게는 여러 천을 이어 알록달록 채색옷을 입힌 것이었다. 단국대는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이 어린이 미라와 유품들을 모아 14일까지 ‘350년 전 소년미라와 가족사랑전’을 연다(문의 02-709-2187~8). 지석도 비석도 표지도 없는 무덤의 경우 여기서 나온 ‘출토복식’은 시대를 알려주는 가장 유력한 물증이다. 각종 과학적 조사 자료가 되기도 할뿐더러 옛 사람들의 개인적 취향과 시대적 유행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요즘엔 장례 때 삼베로 ‘수의’를 따로 지어 입히지만 옛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평소 입은 생활복을 그대로 입혀 묻었기 때문이다. 이런 매장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품이 넉넉한 옷 대신 몸에 꼭 맞는 옷이 유행하면서 ‘수의용’ 옷들을 따로 만들면서부터다. 일제시대엔 각종 물자가 부족해 삼베 일색이 됐고, 오늘날엔 오히려 똑같은 모양의 삼베수의가 수백만원을 호가하며 팔리는 상황이 돼버렸다. 현대적 미감 압도하는 작품도 수두룩

사진/ 출토복식은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사극을 통해 재현되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