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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영화 흥행 ‘복병들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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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2-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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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관객몰이 주도한 카타르시스의 영화들… 단순한 이야기 구조로 지친 마음 위로

사진/ <몽정기>가 '유치하다'는 일부 평가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억압된 섹슈얼리티의 한 주체인 미성년의 성적 자아를 적절히 표출해냈기 때문이란 평가다.
한국영화와 미국영화가 양대 산맥을 이루는 국내 영화시장의 구조는 이제 굳건한 뿌리를 내린 듯하다. 각기 40%가 넘는 관객점유율은 유럽영화를 포함해 그 밖의 다른 영화들을 변방의 제3세계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올해의 흥행작 목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띈다. 미국영화는 <스파이더맨>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블록버스터들이 관객들을 잠시나마 싹쓸이하는 예견된 수순을 되풀이했으나 한국영화의 흥행 지도는 특이한 현상을 보인다. 상반기 흥행작이 <집으로…> <공공의 적> <2009 로스트 메모리즈> <결혼은, 미친 짓이다> 순이고, 하반기는 올해 최고의 흥행작 <가문의 영광>에 이어 <몽정기> <광복절 특사> <오아시스>가 상위권을 이룬다. 이 가운데 <공공의 적> <2009 로스트 메모리즈> <광복절 특사>를 제외하면 대체로 ‘의외의 대박’을 낳은 영화들이다. <투캅스>의 강우석 감독과 설경구 주연의 <공공의 적>이나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과 설경구·차승원 주연의 <광복절 특사>는 실패를 점치기가 곤란할 만큼 흥행이 ‘보장된’ 영화였고,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블록버스터의 잇단 흥행실패 행진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수준이다. 그 밖의 다른 영화들은 한결같이 예상을 뛰어넘어 선전한 경우다. 특별히 돈을 많이 들였거나 대단한 스타가 출동한 것도 아니다.

블로버스터 힘 못쓰는 특이체질 현상

사진/ 올해 예상치 않게 흥행에 성공한 영화 <가문의 영광>(왼쪽)과 <결혼은 미친 짓이다>.
의외의 복병들이 보여준 흥행의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투자·제작자들은 혼미를 거듭하는 경제난 속에서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카타르시스의 영화들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컨셉트가 뚜렷하면서 쉽고 단순하게 가는 영화가 스타들의 출연이나 대작 영화들보다 더 먹혔던 한해다. 여러 가지 의미부여가 가능하겠지만 <집으로…>는 울린다, <아이 엠 샘> 무지 울린다, <몽정기> 웃긴다, <가문의 영광> 무지 웃긴다 식으로 단순화해 간추려볼 수 있다. 경기가 어려울 때 관객들은 문화적 여유나 지적인 게임을 즐기는 것보다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이런 현상이 국내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불황이다 보니 해외 시장에서도 확실한 액션·코믹·섹스물 등이 바이어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가문의 영광>에 대해서는, 조폭 코미디가 홍콩의 갱영화처럼 하나의 트렌드로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평가했다. 조폭이 나오되 다른 주제나 장르와 소통하면서 앞으로도 상당 기간 생명력을 이어갈 것으로 예측했다.

CJ엔터테인먼트의 최평호 상무도 잠재해 있던 관객의 감성을 건드려준 것이 유효했다고 보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었다. “<집으로…>는 급속한 도시화에서 누구나 경험했던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감성적으로 잘 건드려줬고, <가문의 영광> 역시 가족애를 통해 관객들의 보상심리 내지 대리만족을 충족시켜줬고, <몽정기>도 유치한 구석은 있지만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며 누구도 표현하지 못했던 점을 다시 상기시켜줬다. 세 작품 모두 소재를 아주 가깝고 평범한 것에서 찾아 친숙하게 전해줬다.”

사진/ <집으로…>
관객의 정서를 현장에서 체감하는 극장 관계자들도 이들의 견해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씨티극장의 심희장 기획실장은 <집으로…>와 <몽정기>처럼 유형은 달라도 공히 복고적 코드가 담겨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관객의 요즘 취향을 ‘아날로그식 정서’로 특징짓는다. 단순하고 유치할 수 있으나 과거의 향수나 추억이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폭력이 등장해도 의리와 맞물리거나 성(性)도 80년대 과거 회고와 연결돼 있다는 설명인데, 이런 아날로그식 정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로 <집으로…>를 들었다. 반면 “잘나가는 작가주의 영화”는 이 시대의 패배감, 자기 불안 등이 뚜렷히 담겨 있어 위안거리를 찾는 관객과 엇갈리고 있다고 봤다.

복고적 코드 주목… 섹스·폭력에 초점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적 해소는 어딘가 짓눌려 있는 것이 풀려날 때 가능하다. 그 배경을 경제난 하나로 설명해내기에는 어딘가 부족해보인다. 영화평론가 김소희씨는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는 명제로 이를 해결한다. 한국영화가 어떤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가 자유로워지고,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달려드는 작가군이 형성된 건 90년대 이후다. 이들이 그동안 윤리적으로 억압돼온 것, 즉 섹스와 폭력에 초점을 맞췄고 관객도 여기에 호응했다는 것이다.

“먼저 뚫고 나온 게 폭력 코드다. 영화의 주요 관람층은 소시민이고 이들은 일련의 사회 부조리에 좌절감을 느껴왔다. 그런데 현실의 조폭이 아니라 영화 속의 조폭이 무법자처럼 폭력을 휘두르며 분노의 에너지를 표출해줬다.”

그리고 억압된 섹슈얼리티의 주인공이라면 여성·미성년·노인일 텐데, 공교롭게도 화제의 영화들이 이와 맞아떨어진다. 여성 코드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밀애> 등에서, 미성년은 <몽정기>에서, 노인은 <죽어도 좋아> 같은 영화에서 풀어진다. 어떤 이유로든 억압됐던 섹슈얼리티의 소재가 드라마적으로 잘 다뤄지면 흥행으로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사실 <가문의 영광>이나 <몽정기>는 평단과 저널 양쪽에서 ‘그저 그런’ 상업영화로 취급됐다. 이들 영화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고 열광한 평론가는 황진미씨가 거의 유일해보인다. 500만명이 까르르 웃어대며 본 <가문의 영광>의 가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이 영화는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듯하지만, 오히려 주제는 ‘안티-사랑’이다. 영화가 말하는 사랑이란, 뻔한 상황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며, ‘사랑한다 말하고 나니 사랑이 생겨나는’ 지극히 수행적인 것이다. 또 ‘그려! 우리 집안은 깡패여! 어쩔 것이여’라는 김정은의 한마디는 우리의 내면에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던진다.”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천출의식’과 ‘가족 간의 숙명적 연대감’ 그리고 ‘자식을 통한 신분상승 욕구’라는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무의식과 욕망을 노골적으로 깔아놓고, 그 위에 우리의 비겁과, 속물적 애정관을” 스스로 조롱하듯 즐기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10대의 배설되지 못한 성욕을 직설적으로 그린 <아메리칸 파이>의 한국판이라 할 <몽정기>(11월24일 현재 165만명)도 황진미씨가 보기에는 유치하기는커녕 아주 근사하다. “(교생을 사이에 두고 삼각구도를 이루는) 담임선생이 집 앞에서 술 마시고 헤매는 것을 보고 어린 학생이 양보하면서 ‘내 몽정기는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나. 성욕에만 들끓는 미분화된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관계 속에서 책임 있게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성적 자아가 내면적 자아와 맞물려 성숙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코미디의 속도감을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일상의 부조리 코믹하게, 섹스는 시공간 확장

그렇다면 예기치 않은 흥행작들이 가진 속성들은 어디로 치달을 것이며, 한국영화 제작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폭력의 경우는 두 가지로 분화될 것 같다. 스타일이 뚜렷한 장르영화(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나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로 나아가는 쪽과 <가문의 영광>처럼 폭력성이 완화되면서 일상의 폭력성, 일상의 부조리를 코믹하게 건드리는 쪽으로. 섹스영화는 조금 더 나아가지 않을까 싱글들의 성처럼 아직 건드려지지 않은 구석들이 있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이 제작 중인 것처럼 섹스의 상상 범위가 과거로, 또는 외국으로 시공간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김소희)

더 분명한 건 투자·제작에 미칠 영향이다. <집으로…> <가문의 영광> <몽정기>는 50억~60억원을 넘어서는 블록버스터 제작 유행에 비해 적은 예산의 영화들이다. 기획 방향과 이야기가 단순명쾌하고 적절한 예산의 선을 넘지 않는 영화들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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