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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도야 가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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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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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가객들 불러 모으는 디지털 노래방… 온라인 심사받고 동영상 CD에 음반도 제작

한동네 사는 17살 동갑내기 효정, 수빈, 혜정(경기 용인시 수지읍 풍덕천리)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노래귀신’들이다. 밥먹을 때도, 화장실에 앉아서도 흥얼흥얼~ 쉴 틈이 없다. 그렇기에 주머니에 천원짜리 두세장만 잡히면 의기투합, 곧바로 노래방 직행이다. 요즘 이들은 ‘디지털 노래방’에 푹 빠졌다. 하루라도 거를세라 출석도장을 꼭꼭 찍는다. 용돈이 풍족한 날이면 하루에 두번씩도 드나든다.

“마이크 음질도 깨끗하고, 분위기도 산뜻해서 자꾸 오게 돼요. 가장 좋은 건 우리가 노래한 걸 남들한테 보여준다는 거죠. 전국의 누구나 나를 볼 수 있다는 거, 떨리는 일이지만 짜릿하잖아요.”

“나의 노래 실력을 평가해다오”


사진/ '나만의 음반을 갖고 싶다?' 녹음실을 갖춘 노래방에선 비교적 깨긋한 음질의 음반을 만들 수 있다. (류우종 기자)
‘디지털 노래방’은 오프라인 노래방에 온라인 사이트를 결합한 것이다. 효정이네가 단골로 찾는 뮤직네띠앙 노래방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동영상 CD로 구워준다. 이 CD는 인터넷 포털 네띠앙(http://music.netian.com)과 연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담겨 있어 자기의 노래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곧바로 인터넷에 올려 온라인 오디션에 응모할 수 있다. “웬만큼 부르는 애들이면 다 자기 노래 평가받고 싶어하거든요. 학교에서 잘 부른다 하는 애들은 이미 한번씩은 다 디지털 노래방에 다녀갔어요. 얼굴 아는 애들이 노래 부르는 거 인터넷으로 보면 진짜 웃겨요. 어~ 쟤도 나만큼 부르네 하면서 찔끔 놀라기도 하고(웃음).”

“솔직히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수들 보면 나보다 못 부른다고 생각할 때 많아요. 얼굴 예쁘게 생기고 기획사에서 키워주니까 그렇게 뜨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때면 이선희 언니가 요즘 가수들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까지 드는걸요. 노래방에 와서 마이크 잡을 때마다, 나도 전문적으로 트레이닝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이런 생각 들어요.”

사진/ 넓고 깨끗한 홀로 개방감을 살린 인테리어는 요즘 디지털 노래방의 특징이다. (류우종 기자)
한달 전쯤 ‘노래방 엽기녀’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인터넷 노래방 사이트 아이싱어(http://www.isinger.co.kr)에는 매일 150~170여곡이 올라와 네티즌들의 심사를 기다린다. 아이싱어에서 자체 개발한 노래방 기기는 중앙 컴퓨터 서버와 연결돼 손님들이 이 기계로 노래를 부른 뒤 곧바로 인터넷에 올릴 수 있다. ‘노래방 엽기녀’는 마이크를 얌전히 두 손에 모아쥐고 노래를 부르던 여자 고등학생이 흥이 나자 바지를 걷어붙인 채 벽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모습이 그대로 인터넷에 올라 30만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보통 아이싱어 사이트에 자신의 모습을 올리는 이들은 노래 자체로 승부하고자 하는 경우다. 네티즌들은 이를 보고 각자 1~5점까지 점수를 매기는데, 가장 많은 점수를 받는 사람이 그달의 ‘짱’으로 뽑힌다. 아이싱어는 지난달 ‘짱’ 13명을 모아 공개 오디션을 벌였다. 여기서 3등상을 받은 지호(19·전북 익산시)는 지난 7월 아이싱어를 처음 만나 재미를 붙였다. ‘싸이’와 얼굴이 비슷해 일부러 다르게 보이려고 머리를 밀었다는 지호는 자기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가장 중요시한다. 오디션 참가자 중에도 자기가 작곡한 곡을 부른 건 지호가 유일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랩에 미쳤죠. 인터넷에 제 모습을 올리기 전까지는 제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 확인할 수 없었어요. 솔직히 가수 하고 싶어요, 할 수만 있다면.”

‘가수처럼’ 부르며 공중파 스타로

사진/ 인터넷 노래방 사이트에는 네티즌 평가를 원하는 동영상물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인터넷 노래방은 이렇게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의 욕망을 정확히 짚어내고, ‘좁은 문’이나마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10여곳의 연예기획사와 손잡고 있는 네띠앙은 이달 말까지 온라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을 가려 다음달 중순 경연대회를 열 계획이다. 여기에서 1등으로 뽑히면 <첼로> 2집 제작에 객원가수로 전격 기용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아이싱어도 네티즌이 뽑은 인터넷 가수가 충분히 상품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전문 기획사와 연계해 공중파를 타는 스타로 키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전국에 70곳의 가맹점이 있는 사이버리아노래방은 노래방에 달린 웹캠을 통해 실시간으로 기획사의 오디션을 받도록 했다. 노래방쪽에선 ‘여기서 놀다가 나 뜨는 건 아닌가’라는 기대를 주입해 단골을 만들고, 기획사는 나름대로 새로운 얼굴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이 된다.

하지만 제도권 가수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은 일. 모두가 방송을 탈 수도 없다. 소박하게나마 자기 음반을 갖고 싶은 사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녹음할 수 있는 시설도 있다. 네띠앙노래방은 녹음 스튜디오를 갖춰놓고 이런 사람들을 손짓하고 있다. 12곡 정도가 담기는 CD 한장을 만드는 데 30만원 정도 든다. 100만원이 넘는 전문 녹음실에 비하면 훨씬 싼 가격이다. 여기선 인터넷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 노래를 부르면 이를 음반전문 프로듀싱 회사에 온라인으로 쏘아보내 여기서 마스터링을 마치는 과정을 밟는다. 지난달 이곳에서 녹음을 한 문영곤(36·중장비대여업)씨는 이번달에도 또 한장의 음반을 준비 중이다. 지난번엔 평소 좋아하는 노래를 묶었다면, 이번엔 방송을 잘 타지 않고 많이 부르지도 않아 잊혀가는 트로트 명곡들을 엄선할 계획이다. 가수가 꿈이던 그는 자신의 음반이 생기자 20여장을 복사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운전할 때마다 즐겨 듣는다.

90년대 초 붐을 타기 시작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노래방은 현재 전국에 3만2천여곳으로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초창기인 92년엔 서울에 60곳이던 노래방이 8개월 만에 1600곳으로 폭증하는 놀라운 신장세를 보였다. 그간 펌프 노래방 등 일시적 유행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활로를 찾지 못한 채 다른 업종에 밀려 리모델링을 하거나 다양한 사업을 모색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200만명이라는 노래방 이용객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다. 노래방은 외피를 끊임없이 바꾸어가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시장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노래방은 우리나라의 자랑인 막강한 정보통신 인프라를 결합시킨 새로운 수익모델로 등장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사이버리아·팅가팅가(www.tingga.com)를 비롯해 아이싱어·네띠앙 등이 가맹점 확보를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시장에 먼저 깃발을 꽂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제도권 음악계의 온라인 공략 도구

이영미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원은 “인터넷 노래방이 자기 표현의 발현을 극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기존 대중문화 시스템으로 빨아들이는 힘도 더욱 세진 것”이라고 말한다. 엽기적인 표현이든, 가수의 완벽한 재현이든 인터넷 노래방에서의 놀이는 창의력이 아닌 모방 수준에 머물러, 이는 상업주의 음악의 논리와 영향력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지적이다. 또 기획사로 대표되는 제도권 음악계는 사이버 공간에서 오디션을 이벤트화하고 적은 비용으로 입맛에 맞는 가수를 발굴해 이득을 얻는 것이다.

인터넷 노래방을 소비하는 심리엔 ‘가수가 별건가’, ‘그래도 가수가 되고 싶다’라는 욕구가 교차하고 있다. 인터넷 노래방은 그 욕구의 틈새를 파고든다. ‘가수처럼’ 느껴보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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