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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야생초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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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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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구불구불, 덜컹덜컹 4륜구동이 제격인 산길을 한참 올라가서야 영광군 대마면 태청산 중턱에 떡하니 자리잡은 황대권 선생의 묵은 약초농장이 펼쳐진다.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13년 동안 살아내야 한 징역살이를, 적어도 독자가 보기에는 달디단 공동체 삶으로 만들어낸 징역편지를 모아 내놓은 책 <야생초 편지>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작가의 약초농장이다.

황대권 선생과의 인연은 벌써 3년 전인가 보다. 공부와 징역살이만 해온 아들이 사회에 나오면 농사라도 짓게 할 양으로 아버님이 사놓은 땅에 징역 풀리지마자 내려와 밭을 일구고 약초를 심어 5만여평의 약초농장을 만들던 허름한 농사꾼의 행색 그대로였다.

3년 전 한무리의 후배들이 달랑 남자 둘이 사는 농장 한켠의 컨테이너에 끼어 앉아 장마비 피해온 나방 쫓으며 징역살이와 농사짓는 어려움, 감시, 이루고픈 생태공동체의 꿈에 날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한 시간 칼잠에 찌뿌드드한 기지개 켜자 발 아래는 헉! 피어오르는 구름더미. 신선이 된 듯한 착각이 아직도 번연히 남아 있다. 태청산 기운 빌려 생태공동체 마을이 들어앉을 날이 머잖았음에 가슴벅찬 기억까지도….

요즘 태극전사들의 몸보신용으로 불티나는 가시오가피가 쓰디쓴 이파리 몇장을 달고 꿋꿋이 서있는 듯 보여도 3년간 주인의 손을 타지 않은 오가피며 당귀들은 칡넝쿨에 잡아먹혀 버렸다.

1999년 7개월여의 씨름 끝에 농장의 모양새를 갖출 무렵 징역살이의 위안이던 네덜란드 앰네스티와 국영TV의 초청을 받아 간 길이 유럽생태공동체 기행과 생태농업 공부로 3년의 세월을 훌쩍 넘겨버리고 칡넝쿨은 저리도 뻗어나갔다.

“염소 키우잖게! 칡 잡는 것은 염소가 젤이여. 염소탕집도 허고.” 처음 농장을 일구는 데 큰도움을 준 융석씨 말에 “여긴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안 된다”며 감아올라간 칡넝쿨에 눈이 멎는다.


징역풀리면 가꾸리라던 야생초밭을 대신해 겨우 장안동 옥상 한 자락에 마련한 채전밭에 만족해야 하는 서울살이여도 때늦은 노부모 봉양에 아직 공동체 엮을 일은 머릿속으로만 그려볼 밖에 짬이 없는 듯하다.

오랜만에 제집 찾은 사람처럼 신바람에 훨훨 날 듯 단박에 여기저기 5만평의 농장을 둘러보더니 싹쓸이당한 오가피나무에 속이 상한다. 월드컵 이후 오가피 인기가 높아지자 맘먹고 털러온 도둑에 의해 농장의 오가피가 손을 탄 모양이다.

간간이 동네어른께 인사도 하며 내려오는 길에 한가롭게 메밀밭에 내려앉은 한 무리의 꿩들이 발목을 잡고 일행의 탄성은 꿩떼를 오히려 멀리 날려보낸다.

“농업을 상업화 하지 말라.” 어느 강연에선가 외친 야생초 선생의 외침이 요사이 농민들의 핏발선 구호와 맞닿아 있는지 모르겠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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