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욕망의 반란’에 떠는 남성들

328
등록 : 2000-10-04 00:00 수정 :

크게 작게

한 여자를 둘런싼 두 남자의 성적 긴장을 다룬 <피델리티> <글루미 선데이>

(사진/영화 <피델리티>)
최근 개봉했거나 개봉할 두편의 유럽영화 <피델리티>(Fidelity)(안드레이 줄랍스키)와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롤프 슈벨)는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 커플 사이에 매력있고 재능있는 젊은 남자가 끼어들면서 생겨나는 감정의 파문과 성적 긴장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피델리티>… 정절로 돌아가는 소피 마르소

<피델리티>의 여인 클레리아는 부르주아 가문의 클레베와 결혼한 직후, 재능과 매력을 겸비한 동료 사진작가 네모에게 빠져들어 아내로서의 신의와 내적인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클레리아와 네모의 감정은 사진을 매개로 오가며 사진을 통해 외부로 표현된다. 클레리아가 찍어내는 인물 사진은 마치 그녀의 내부가 그런 것처럼 심하게 요동치며 흔들린다.


현실의 한순간을 2차원의 평면에 고정시키는 것을 특징으로 삼았던 사진이라는 매체가 여기서는 현실의 역동성과 사물의 움직임을 그대로 포착하고 싶어한다. 고정된 패턴의 인물 사진 혹은 명상적인 풍경 사진이 사진의 전부인 줄 알았던 우리에게, 사진이라는 장르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같은 자의식은 영화 <피델리티>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다. 그 다음으로 아름다운 것은 서안해양성 기후의 겨울 햇빛, 금속성 은빛으로 빛나는 바다의 이미지이며, 세 번째가 소피 마르소이다.

<글루미 선데이>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레스토랑에서 시작하여 6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곳의 주인 자보는 유대인 특유의 상업적 근면성과 라비 같은 정신의 깊이를 가진 중년 남자이며, 그의 연인 일로나는 ‘동유럽의 진주’로 불리는 부다페스트의 진주라고 할 만한 여인이다. 풍성한 흑발에 투명하고 깊은 눈동자, 순수한 마음을 가진 그녀는 레스토랑에 오는 모든 남자들을 사로잡는데, 이들 부부가 고용한 피아노 연주자 안드라스도 그 중 하나다. 세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는 감정의 격동을 거친 끝에 성적 관계를 포함하는 공동의 운명체로서 서로를 인정한다.

일로나와 안드라스를 이어주는 것은 음악이다. 안드라스가 작곡한 <우울한 일요일>은 두 사람의 운명뿐만 아니라 이 영화가 끌어들이고 있는 다양한 스토리를 탄탄하게 엮어내는데, 특히 나치가 휩쓸던 시기 유럽의 정치적·심리적 상황에 대한 뛰어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음악을 들은 사람들의 자살 행렬이 이어지는 것은 나치즘의 확산에 대한 마조히스틱한 반응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두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피델리티>의 클레리아는 그 자유분방함과 독립심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죽은 다음에조차 정절(fidelity)에 꽁꽁 묶여 있다. 줄랍스키 감독이 젊은 아내 소피 마르소에게 느낌직한 불안과 욕망이 투사된 듯하지만, 어쨌거나 사랑의 이름으로 여성을 ‘정화’시킨 감독에게 많은 남성들이 안도의 박수를 보낼지도 모른다. 반면 <글루미 선데이>에서 일로나는 두 남자를 모두 사랑하며 남자들의 동의하에 양쪽으로 성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두 남자의 관계는 질투를 거쳐 우정으로 발전한다. 롤프 슈벨 감독은 제도와 윤리가 사라지고 남은 상태에서 경험하는 순수한 사랑, 우정, 질투의 감정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글루미 선데이>… 성적관계 포함하는 공동의 운명체

(사진/<글루미 선데이> )
오늘날의 성과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영화가 이런 발칙한 상황을 앞다투어 다루고 있는 것일까? 현대 영화이론이 개척한 풍부한 이론적 보고인 정신분석학에서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이 상징계라고 이름 지은 의식세계는 정신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상징계는 개인을 사회질서 속에 포섭된 주체로 만들어내는 장소인데, 이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와 억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틈새를 따라 되돌아온다. 이드·자아·초자아의 정신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이며, 영화란 억압되었다가 귀환하는 정신/사회의 욕망을 펼쳐보이는 “욕망의 미장센”이다.

이러한 틀에서 보면 <글루미 선데이>의 주인공들이 성인군자의 도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억압 이전의 리비도로 퇴행하는 것은 심리적이며 사회적인 저항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 각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근대사회가 이성과 문명의 이름으로 육체와 자연을 억압해온 ‘이성 독재’의 시대였다면, 억압없는 문화를 원하는 새로운 시선은 자연히 육체와 자연을 새롭게 보는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가 개방적이고 다원화된 변혁 이론의 중심부로 진입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경제 체제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같은 추세는 필연적이다. 사실 “누구나 자유롭게 사랑하고 결혼한다”는 근대의 연애결혼 신화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노동력 재생산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시스템이자 이데올로기이다. 남성 노동력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속에서 노동의 영역에 나가지 못하는 존재의 섹슈얼리티는 무시되거나 터부시된다. 어린이와 청소년, 여성, 노인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거나 민망한 것으로 여기는 관행이 그 증거이며,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을 때 경제력과 성욕을 가진 여성에 대해 남성들이 느끼는 불편함을 표상하는 요부(팜므 파탈)영화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더이상 이같은 형태의 노동력 구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동 집약 산업에서 자본 집약, 나아가 기술 집약 산업으로 이동하고, 피임이나 인공수정 등 노동력 재생산과 섹슈얼리티를 분리시키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더이상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집안을 돌보다가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되는” 삶을 자연스런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욱이 친밀한 사적 영역의 전문가로 훈련된 여성들은 새로운 성 혁명, 가족 혁명을 주도할 가능성이 있다. 앞의 두 영화에서도 관계를 주도하는 사람은 여성이고, 남성들은 여성이 그들의 욕망에 반란할 것인지 혹은 공모해 줄 것인지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불안에 떨고 고통받는 연약한(?) 존재로 묘사된다.

변화된 시대, 일상을 민주화하라

우리 사회에는 지금 맞벌이 부부, 동거 부부, 한부모 가족, 독신가구, 노인단독가구, 동성애자 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출현하고 있으며, 최근 문제가 된 낮은 출산율 문제는 외국인 노동력의 유입을 가속화시키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머잖아 본격적인 다인종사회로 접어들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이를 가족의 해체라고 우려하며 청소년 비행 등의 사회문제를 “가정 파탄” 때문이라고 돌린다.

그러나 이것을 붕괴의 조짐보다는 현대세계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새롭고 다양한 가족형태의 등장으로 보는 것이 좀더 현실적인 안목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이것이 섹슈얼리티와 욕망의 카니발 속에서 질펀하게 놀아보자는 주장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일부일처 제도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혼외정사와 매매춘 등 ‘성욕의 해방’을 즐긴 남성의 이중규범이 더 외설스럽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의 해방’을 가능케 하고 지속시킬 수 있는 규범과 윤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많은 사려깊은 시민들이 이제 제도로서의 가족을 유지하려는 강박관념보다는 가족구성원의 감성과 친밀성을 중시하면서, 모든 종류의 삶의 방식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연습함으로써 일상 생활을 민주화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연예인 홍석천씨가 자신이 동성애자이며 그것은 “영혼의 문제였다”는 울림 큰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 언론과 대중이 보여준 동성애공포증은 우리 사회의 성담론이 어디쯤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김소희/ 영화평론가cwgod@hanmail.net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