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적 상황, 생활풍습과 함께 보는 패션의 역사, 탄생과 확산의 과정
독일의 문화사가 막스 폰 뵌의 <패션의 역사>(한길아트 펴냄· 전 2권 각 1만8천원)는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패션의 역사를 섭렵한다. 원래는 방대한 분량으로 쓰인 책이지만, 독자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의상학자인 잉그리트 로셰크가 이를 두권의 분량에 간략하게(?) 요약하여 담아놓았다.
십자군 원정이 패션을 탄생시켰다
이 책의 내용은 주로 패션의 역사에 바쳐지고 있으나,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패션의 변화를 낳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어지럽게 등장하는 패션의 용어들이 우리처럼 낯선 문화와 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당혹감을 주기는 하나, 패션에 관한 얘기와 별도로 당시의 예술적 조류에 대한 간략한 기술과 당시의 여러 가지 생활풍습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들이 곁들여져 있어, 굳이 패션 전문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흥미를 잃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다. 가령 식탁에서 장난을 치는 귀족의 자녀들이 부엌으로 끌려가 하인들에게 매를 맞았다거나, 심지어 왕세자인 프랑스의 루이 14세까지 어린 시절에는 지겹도록 매를 맞았다는 얘기는 궁정과 귀족에 대해 다른 표상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는 충격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이 책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의 유행은 십자군 원정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십자군의 기치 아래에 여러 민족이 한데 모였고, 이것이 다양한 민족의 패션을 바라보는 예민한 시각을 갖게 해주고 외국 패션을 선호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패션이라는 것이 전세계적 현상이 되는 것은 좀더 후대의 일이다. 17세기 초반에는 스페인 궁정의 패션이 몇몇 다른 나라의 패션의 모델이 되었고,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에서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된 것은 17세기 말 프랑스 궁정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모든 유행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나왔고, 거기에서 나온 프랑스의 궁중 패션은 전세계적인 패션이 된다. ‘유행’이라는 말이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프랑스의 유행은 그 이전의 국지적인 유행 현상과는 달리 자주 변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라는 거의 달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는 (하르스되르퍼)말도 있었다. 또한 패션이라는 말과 결부되어 있는 부정적 연상도 이미 당시에 존재했다고 한다. 외국의 옷이 외국의 관습과 죄악을 함께 가져온다는 것이다. “최신 유행의 옷, 최신 유행의 감각. 겉이 변하면 속도 변한다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 금제로부터의 해방, 몸의 구속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에서 이른바 ‘에티켓’이라는 것이 먼저 궁중과 귀족사회에서 발생하여, 시민계급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점차 사회의 하층에까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기술한 바 있다. 이 문명화 과정의 일반적 경로를 따라서 패션 역시 먼저 궁중에서 비롯되어 점차 하류층까지 확산된다고 한다. 원래 복장이 신분의 차별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이 패션의 모방 현상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각 계층에 합당한 옷감과 옷 만드는 법 등을 엄격한 규정으로 규제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유행이 나오면 곧바로 수십 가지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규정이 제정되기도 했는데, 이런 시도도 인간들의 사회적 모방욕과 패션의 변화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규정은 도처에서 위반되었다. 이런 사회적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이유에서 패션을 성토한 성직자들이나 도덕주의자들의 비난도 패션을 제어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본의 아니게 신분 사이의 평등과 금제로부터의 자유를 낳은 게 아닐까?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유행의 대중화를 선도한 것은 기성복의 출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유행이 민주화의 길을 가는 길에서 기성복이 점점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쨌든 패션에 대한 욕망은 강렬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은 머리에 벌레가 생겨도 개의치 않고 머리의 모양에 신경을 썼으며, 허리가 끊어져 죽음에 이르도록 코르셋을 졸라맸다. 코르셋이 다이어트로 바뀌었을 뿐 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미의 순교자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미를 위해 패션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인간의 몸은 잠깐이나마 계몽주의 시대에 비로소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해방된다. 이 시기에는 허리를 조였던 코르셋과 종모양의 치마를 벗고 인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주는 패션이 유행한다. 이 책은 패션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과 연관된 사회, 정치, 문화, 풍습 등의 다양한 문화사를 함께 다루고 있어, 자연스레 요즘 유행하는 미시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패션 그 자체의 역사를 고립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패션을 매개로 유럽사회에 대한 문화사적 조명을 하고 있다. 실제로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정작 패션에 관한 얘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당시의 습속에 관한 기술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여겨질 정도다. 당시의 과격한 음주습관, 점잖은 귀족들의 주먹다짐, 개를 잡아죽이는 아이들의 잔인한 놀이, 종교 전쟁시의 식인풍습과 갖은 엽기적인 일화들. 예술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바로크의 거장 베르니니가 연출한 무대장치를 보고 관객이 연극을 보다가 인위적으로 연출된 파도 혹은 화재의 장면을 보고 기겁해서 극장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얘기는 미술사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다. 예술사와 패션의 엉성한 고리
(사진/위에서부터 루카스 크라나흐<마리아 막달레나>(1525년 작품). 아우구스트 마케 <모자가게>(1914년 작품) ) 역사를 추상적으로 구획된 시기 안에 배열된 사건의 연속으로 보거나 혹은 어떤 법칙의 전개과정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과거의 생활사를 현상학적 질의 생생함을 가지고 독자 눈앞에 펼쳐보인다. 역사의 앙상한 골조만 갖고 있는 독자들은 이 책의 수많은 일화들로 그 골조의 빈 곳을 채울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저자의 서술에서 불만스러운 것은 예술사와 패션의 역사 사이의 관계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패션은 사회적 현상이자 무엇보다도 미적 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각 시대를 지배했던 미적 취향이 어떤 식으로든 패션감각에 영향을 끼쳤을 법하다. 예술과 패션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적인 미감을 드러낼 법도 한데, 저자의 서술에서는 양자의 연관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을 이루는 예술사적 서술이 패션의 역사와 외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 패션을 통한 문화사적 접근에 걸맞으려면 사회적 현상과 패션의 내적 연결 역시 명확히 드러나야 하는데, 그 부분의 연결도 실은 매우 취약하게 느껴진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이 책에 따르면 서구에서 최초의 유행은 십자군 원정 때문에 발생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십자군의 기치 아래에 여러 민족이 한데 모였고, 이것이 다양한 민족의 패션을 바라보는 예민한 시각을 갖게 해주고 외국 패션을 선호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패션이라는 것이 전세계적 현상이 되는 것은 좀더 후대의 일이다. 17세기 초반에는 스페인 궁정의 패션이 몇몇 다른 나라의 패션의 모델이 되었고,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에서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된 것은 17세기 말 프랑스 궁정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모든 유행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나왔고, 거기에서 나온 프랑스의 궁중 패션은 전세계적인 패션이 된다. ‘유행’이라는 말이 오늘날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프랑스의 유행은 그 이전의 국지적인 유행 현상과는 달리 자주 변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라는 거의 달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라는 (하르스되르퍼)말도 있었다. 또한 패션이라는 말과 결부되어 있는 부정적 연상도 이미 당시에 존재했다고 한다. 외국의 옷이 외국의 관습과 죄악을 함께 가져온다는 것이다. “최신 유행의 옷, 최신 유행의 감각. 겉이 변하면 속도 변한다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 금제로부터의 해방, 몸의 구속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에서 이른바 ‘에티켓’이라는 것이 먼저 궁중과 귀족사회에서 발생하여, 시민계급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점차 사회의 하층에까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기술한 바 있다. 이 문명화 과정의 일반적 경로를 따라서 패션 역시 먼저 궁중에서 비롯되어 점차 하류층까지 확산된다고 한다. 원래 복장이 신분의 차별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나타내는 기호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이 패션의 모방 현상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시에는 각 계층에 합당한 옷감과 옷 만드는 법 등을 엄격한 규정으로 규제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유행이 나오면 곧바로 수십 가지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규정이 제정되기도 했는데, 이런 시도도 인간들의 사회적 모방욕과 패션의 변화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규정은 도처에서 위반되었다. 이런 사회적 이유가 아니라 종교적, 도덕적 이유에서 패션을 성토한 성직자들이나 도덕주의자들의 비난도 패션을 제어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패션은 본의 아니게 신분 사이의 평등과 금제로부터의 자유를 낳은 게 아닐까?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유행의 대중화를 선도한 것은 기성복의 출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유행이 민주화의 길을 가는 길에서 기성복이 점점 더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쨌든 패션에 대한 욕망은 강렬한 것이어서 당시 사람들은 머리에 벌레가 생겨도 개의치 않고 머리의 모양에 신경을 썼으며, 허리가 끊어져 죽음에 이르도록 코르셋을 졸라맸다. 코르셋이 다이어트로 바뀌었을 뿐 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미의 순교자들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미를 위해 패션의 감옥에 갇혀 있던 인간의 몸은 잠깐이나마 계몽주의 시대에 비로소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해방된다. 이 시기에는 허리를 조였던 코르셋과 종모양의 치마를 벗고 인체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주는 패션이 유행한다. 이 책은 패션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과 연관된 사회, 정치, 문화, 풍습 등의 다양한 문화사를 함께 다루고 있어, 자연스레 요즘 유행하는 미시사의 성격을 띠고 있다. 패션 그 자체의 역사를 고립적으로 다루기보다는 패션을 매개로 유럽사회에 대한 문화사적 조명을 하고 있다. 실제로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정작 패션에 관한 얘기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당시의 습속에 관한 기술이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여겨질 정도다. 당시의 과격한 음주습관, 점잖은 귀족들의 주먹다짐, 개를 잡아죽이는 아이들의 잔인한 놀이, 종교 전쟁시의 식인풍습과 갖은 엽기적인 일화들. 예술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바로크의 거장 베르니니가 연출한 무대장치를 보고 관객이 연극을 보다가 인위적으로 연출된 파도 혹은 화재의 장면을 보고 기겁해서 극장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얘기는 미술사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다. 예술사와 패션의 엉성한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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