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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영화 ‘대세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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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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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나타난 변화의 징후들… 다양한 형식·내용적 실험의 성과 두드러져

사진/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식이 열린 범일동 부산시민회관 전경. (씨네21 손홍주 기자)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식이 열리던 11월14일 저녁, 범일동 부산시민회관 앞은 화려한 붉은 카펫으로 수놓아졌다. 칸영화제처럼 정장 차림을 공식화한 ‘드레스 코드’가 올해 처음으로 도입돼 많은 영화인들이 연미복과 이브닝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입장하면서 화려함은 빛을 더했다. 붉은 카펫 한쪽에 또 다른 ‘붉은 무늬’가 조용히 버티고 있었다. 붉은색 판초우의와 마스크를 쓴 10여명의 침묵시위대. 스크린쿼터문화연대가 주도한 이 시위대가 잔치 분위기를 망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지난 6월, 다른 나라에 문화시장 개방을 요구하는 정부의 문화분야 세계무역기구(WTO) 양허안 제출을 규탄하며, 양허안 철회를 요구하는 침묵시위를 벌이는 것이었다. 다른 나라에 문화시장의 개방을 요구한다면 우리 역시 개방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는 미국이 원하는 스크린쿼터의 폐지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시위대가 나눠주는 전단의 첫 문장은 이렇다. “또다시 한국 영화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죽어도 좋아> 상영의 역설적 현실

사진/ 한국 거장의 손자국을 보라! '전통과 모더니즘의 가교'라는 테마로 회고전이 열린 김수용 감독의 핸드프린팅. (씨네21 손홍주 기자)
다음날 오후 남포동 부산국제영화제 광장. 영화의 거장들이 남기는 손자국 행렬에 또 한명이 합류하는 행사가 떠들썩하게 열렸다. 현재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 위원장인 김수용 감독의 핸드프린팅 행사였다. 부산영화제쪽은 1950년대 말부터 <갯마을> <화려한 외출> <안개> 등 109편의 영화를 만든 김수용 감독에 대해 ‘전통과 모더니즘의 가교’라는 테마로 회고전을 마련하고 올해 유일의 핸드프린팅 자격 수여와 다큐멘터리 상영, 오픈토크 등의 행사를 열어 그를 집중조명했다. 다른 한쪽에선 ‘표현의 자유와 영등위 개혁을 위한 포럼’이 그를 비난하는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지금 부산에서는 매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 여름 영등위가 ‘제한상영관 없는 제한상영가 결정’, 다시 말해 제한상영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검열을 자행해 우리를 놀라게 한 영화 <죽어도 좋아>의 상영과 검열의 중심에 있던 영등위 위원장 김수용 감독의 회고전이 나란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성기 노출’이라며 <죽어도 좋아>의 자기검열을 유도한 김수용 감독의 예술관, 그리고 김수용 위원장에 의해 불필요한 음란물이 돼버린 <죽어도 좋아>가 동시에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초대됐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죽어도 좋아>는 영등위 등급분류에서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은 뒤 화면을 일부 손질하는 진통을 겪고서야 18살 이상가 등급을 얻어냈다. 이 영화는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 변영주 감독의 <밀애>와 함께 부산영화제의 유일한 경쟁부문인 ‘새로운 물결’ 부문에 선정된 한국 영화로 일찌감치 3회 전 좌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죽어도 좋아>와 김수용 감독의 재회는 확실히 부산영화제의 ‘역설’이다.

위기와 역설 같은 험악한 단어가 어지러이 떠돌지만, 근본적인 위기나 화해불능의 충돌이 아닌 한 그건 한국 영화가 뿜어내는 격렬한 에너지의 방증이기도 하다. 또 작게는 한국 영화, 넓게는 아시아 영화의 화두를 한곳에 모아내는 부산영화제의 저력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제 칸·베를린·베니스 영화제 등 세계 3대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동시에 찾아올 만큼 위세가 커진 부산은 영화계의 ‘이슈 파이팅’을 벌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가 아닐까.

사진/ PIFF 광장에서 <해안선>출연·제작진이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부산은 아시아 영화의 훌륭한 쇼윈도가 됐다. 영화제 네트워크가 할리우드의 전 세계적 배급에 대응하는 거의 유일한 대안적 배급기구가 되고 있는 현상은 역사의 흥미로운 전개다.”

영화를 좀더 자세히 체계적으로 들여다보려면 거쳐가게 마련인 <필름 아트> <세계영화사>를 쓴 데이비드 보드웰 위스콘신대 교수가 부산영화제를 찾아와 그 위상을 간단명료하게 짚어냈다. 영화제뿐 아니라 한국 영화의 ‘위세’도 높이 평가했다. “미국의 영화산업까지 한국의 영화제작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 영화는 현재 아시아 영화제작의 성공 스토리가 됐다. 특히 한국 영화는 대중적인 전통을 희생시키지 않는 동시에 영화제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나는 언제나 자기 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 베이스가 없는 내셔널 시네마란 어딘가 작위적이라고 느낀다.”

개봉에 앞서 부산에서 첫 모습을 드러낸 한국 영화들이 가리키는 눈길은 어디쯤에 닿아 있을까 일찌감치 화제가 됐으나 일반 관객과는 처음 만난 <죽어도 좋아>를 두고 허문영 부산영화제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는 <집으로…> <오아시스>와 함께 한국 영화의 세대적 폐쇄성, 윤리적 결핍을 메워주는 작품으로 평가했다(<집으로…>와 <오아시스>는 한국 영화 파노라마 부문에 선정됐다). 1990년 중반부터 한국 관객과 평단은 새로운 한국 영화에 절대적 지지를 보냈지만 “그 새로운 한국 영화는 늘 젊은이들의 놀이터”였다는 것이다. 노인·장애인 등 이들 영화에 등장하는 특별한 주인공들이 한국 영화가 외면해온 그래서 ‘타자’가 돼버린 존재를 우리 곁으로 불러온 것이다. 그 가운데도 <죽어도 좋아>는 좀더 각별하다.

“60여분의 짧은 러닝타임에 비해 지나치게 길어보이는 이들의 사실적 정사장면이야말로 이들의 낯선 이미지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이다. 물신화가 불가능한 이들의 노쇠한 육체는 우리의 관음적 눈길을 괴롭히지만 그들의 이미지엔 불가해한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죽어도 좋아>는 타자성을 고민하지 않고 타자의 이미지에서 생의 감각을 포착한다. 그건 한국 영화에서 가장 낯설고 진귀한 체험 가운데 하나다.”

폐쇄성·결핍 메우고 새로운 캐릭터 선보여

15일 밤 11시가 넘도록 수백명의 관객들이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각본·연출)에 취해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관객 대부분이 자리를 지킨 채 영화 상영이 끝나고 마련된 감독·배우와의 대화시간을 ‘열광적으로’ 즐겼다. 다음날부터 ‘미확인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기 시작했다. 올해 한국 영화 최대의 발견이라는.

<질투는 나의 힘>은 옛 애인을 빼앗은 유부남(문성근)에게 새 애인(배종옥)마저 빼앗길 위기에 놓인 청년(박해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섬세한 로맨스 영화다. 놀라운 건 주요 인물들이 지금까지 한국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캐릭터라는 점이다. 분노와 분통을 터뜨려야 마땅할 이 청년은 뜻밖에도 문제의 유부남이 일하는 잡지사에 제 발로 들어가더니 직장 상사가 된 그와 점점 친해지고, 그를 닮아간다. 그렇다고 문제의 유부남을 존경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도 못 피우고 아내에게도 잘 못하는 등신”이 되기보다 끝없이 새 연인을 만들며 아내에게도 잘해주는 게 현명하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모든 일에 머뭇거리거나 혼란을 느끼는 청년과 다르다.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안을 현실적인 ‘철학’에 근거해 간단명료하게 처리하니 오히려 청년보다 남에게 덜 피해를 준다. 복합적인 내면의 캐릭터들이 툭툭 던지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성찰의 재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상식적인’ 이야기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허문영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가 지적하는 것처럼, <질투는 나의 힘>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나 <밀애>처럼 유독 로맨스 또는 멜로 장르를 통해 작가의 야심만만한 패기를 드러내려는 올해의 한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한국 영화 파노라마를 통해 처음 선보인 <욕망>(감독 김응수)은 아예 멜로보다 한 단계 나아간 포르노그래피의 외피를 두르고 이 시대의 허망한 욕망을 들춰내려고 한다. 마네킹처럼 생명력이 없는 캐릭터들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는 바람에 울림이 작은 게 문제다.

<섬>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를 베니스와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킨 김기덕 감독은 영화제들이 앞다퉈 초대하는 유명인사가 됐다. 여덟 번째 작품 <해안선>이 부산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데는 작품의 힘도 있겠지만, 감독의 국제적 지명도가 적잖은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애초 2억원짜리로 기획된 저예산영화 <해안선>에는 일급 스타 장동건이 <나쁜 남자>를 보고 자진해서 배역을 맡은 화제성도 한몫했다. 올해 유난히 ‘스타 기근’ 현상이 보이는 부산에서 장동건의 남포동 출현은 굉장한 위력을 발휘했다.

<해안선>은 위악적인 인간들의 처절한 본능이 어떻게 타인을 다시 짓밟는지를 날것처럼 보여주는, 김기덕 감독 특유의 재능이 여전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흥미로운 건 김기덕식 긴장을 뚜렷이 이완시킨 대신 그동안 좀체 드러내지 않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이다. 5년 동안 해병대 생활을 한 김 감독은 군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비극성을 한반도 전체의 모순으로 넓혀 은유해내려는 시도를 벌인다. 간첩 체포가 꿈인 해안선 초소 병사(장동건)가, 제한구역 안에서 마을 처녀와 정사를 벌이던 마을 청년을 간첩으로 오인해 사살한다. 처녀는 미쳐버리고 다른 군인들에게 몸을 유린당한다. 초소 병사는 자책감에 시달리다 정신마저 이상해져 의병 제대를 하지만 부대 주변을 맴돈다. 처녀와 초소 병사의 뒤틀림은 다른 부대원들로 조금씩 전이되고 비극의 강도는 가속도를 얻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의 판타지를 강하게 밀어붙여온 김기덕의 뚝심이 만들어내는 비약과 과장은 이따금 눈에 거슬린다. 하지만 ‘신성스러운’ 군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의 진지한 태도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한국 영화의 빛나는 성취를 즐겨보라

오픈 시네마 부문을 통해 먼저 관객과 만난 <광복절 특사>는 <주유소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으로 대중적 유머 감각을 키워온 김상진 감독의 신작이다. 광복절 사면 대상인 두 죄수(설경구·차승원)가 불행하게도 사면 사실을 모르고 탈옥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이다. 김 감독은 유머를 위해서는 영화의 예술적 태도를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투의 말을 공공연히 해왔다. 이 영화는 <주유소습격사건>에서 언뜻 보여준 것처럼 국회의원, 경찰, 교도소 간부 등 권력의 상징을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이걸 풍자정신의 산물이라고 보기에는 좀 곤란하다. 김 감독은 이제 권력에 대한 비웃음을 유머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방법론화시킨 듯하다.

타자와의 새로운 만남, 멜로 장르의 주목할 만한 변주들, 상업성과 진지한 주제의식을 동시에 낚아채려는 은근한 노력들, 화제의 감독이 보여주는 갑작스런 변신이나 지독한 일관성…. 23일까지 계속되는 부산영화제가 보여주는 한국 영화의 최근 모습이다.

부산=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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