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둔치에 서서
등록 : 2002-11-20 00:00 수정 :
하루종일 가슴이 먹먹했다.
11월13일, 한강 둔치를 농민들로 메우기 위해 파김치된 몸으로 마을마을 누볐을 활동가들의 노고에 가슴이 더워오고 아스팔트의 냉기를 몸으로 데워내며 칼바람에 맞선 할매들의 굽은 등허리가 한숨겹다.
새벽 댓바람부터 버스와 사람들로 영광터미널 근동은 점령당했다. 방송차는 동네와 면별로 나눠 버스에 올라타라고 목소리 높이고 43대 차량의 꼬리는 행방이 묘연하다. 홍농 사는 후배를 찾으러 두 바퀴를 돌아도 끝내 못 찾고 집행부 차를 얻어 탄다.
워낙 많은 수가 움직여서 차 안의 교육이 어려울 것을 감안했는지 비디오가 노래배우기, 교육, 선전을 담당한다. 구호연습까지….
6년 만에 찾아가는 농민대회는 800만이었던 농민이 어느새 400만명으로 줄어 있었다.
3천대의 버스가 여의도로 모이면 교통대란도 문제지만 다수의 농민 참여가 어렵다 판단 아래 영광·장흥·함평 등 서남권 지역은 상암운동장에 차를 대고 지하철로 이동하라는 지침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다 한 사람이라도 잃어버리면 어쩌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지만 그래도 집회 참여가 중요하다는 말에 설득되어 두번 갈아타야 하는 여의나루를 찾아 빨간 머리띠를 두른 농민들이 지하철을 누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소란해진 지하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온 농민들은 “이것이 서울 추위당가” 몸을 부르르 떨며 죽어라 자기 고향 깃발을 쳐다보며 걷기 바쁘다.
하루 전에 올라왔다던 진도 농민과 비행기 2대를 전세내어 육지로 왔다는 제주도 농민까지 이미 대회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해방 이후 최대 농민대회를 만들어낸 감격에 농민들의 함성은 높아가고 정부와 정치권을 향한 분노는 마침내 계란과 돌팔매질로 이어진다.
아예 오지도 않은 후보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조·중·동은 계란 이야기만 나발불겠다며 농민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공산품 팔아먹는 재미로 농업을 몽땅 내어바친 한-칠레 협상을 저지하고 재협상을 목터져라 외치는 한강 둔치의 농민들은 자신들만의 생존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민족의 혼이 깃든 쌀 개방 반대”를 애국심에 호소하기 위해서만도 아니다. 당장 불어닥칠 식량위기·환경파괴·통일대비를 위해 농업을 살려야 한다며 복장 터져 한다.
어스름한 한강 둔치를 뒤로 하고 상암운동장으로 되짚어가는 길은 더욱 바람차다. 자칫 퇴근대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었는지 환승역인 공덕역까지 걸어가란다. “워째 한강다리가 서해대교보다 길다냐”며 강바람에 얼얼해진 농민들이 몰려가는 마포 일대는 의도하지 않은 시위대열이 만들어진다.
농민가 대신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유행가가 온 마포 일대를 뒤덮는다.
어찌어찌 깃발만 보고 찾아온 농민들 마을사람 안부에 바쁜 숨고르고 소주잔 돌리며 추운 기 달랜다. 서울아 잘 있거라. 아무리 시피(우습게) 보여도 우리 고향땅이 질(제일)이다.
꽁꽁 더 얼어붙기 전에 갈아엎을 쟁기 만들러 농민들 서둘러 영광땅으로 바퀴를 돌린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