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부터 뒤라스까지, 술기운 빌려 작품 만든 고주망태 예술가들 이야기
‘알코올과 예술가’라는 제목은 조금 과장스럽다. 시인과 소설가 이외의 예술가가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엽부터 LSD·마리화나 등의 환각제가 한 시대를 규정지은 1960년대 이전까지 대략 한 세기 동안 현대문학이 술과 어떤 상호작용을 해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접근하는 시야의 폭이 무척 넓어서 ‘알코올의 사회사’에 대한 궁금증까지 기꺼이 풀어준다.
취기 대신 숙취로 그림 그리기도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인 지은이는 <악의 꽃>으로 유명한 보들레르로 말문을 연다. 보들레르는 당시 한창 번성하던 부르주아적 생활방식을 추악하게 바라봤다. 매 순간 시간에 대한 관념과 감각에 짓눌려 지내야 유용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체제가 악몽으로 다가온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항상 취해 있으면 된다. 보들레르는 <벌거벗은 내 마음>에서 “자아의 증발과 집중, 거기에 모든 게 있다”고 했는데, 취기가 그 방편인 것이다.
술기운은 시간의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몸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인공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래서 술에 취해 쓰는 글은 즉흥적이며 억압적이지 않다. 재즈 연주자들이 즉흥 연주를 하기 전에 술로 흥을 돋우는 것과 같은 방식을 활용한 이는 비트 제너레이션의 성전이 된 소설 <길 위에서>를 쓴 잭 케루악이다. 그는 “글을 쓰고 싶다면 술에 취해 극도의 흥분 상태로 책상에 앉을 것”을 권했다. 술의 ‘부화 기능’을 활용한 또 다른 예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그는 잔뜩 술을 퍼마신 다음날 오전의 숙취를 빌려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책을 술과 더불어 쓴 것과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이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다. <죽음의 병>을 쓸 때는 하루에 포도주를 6리터씩 마셨다. “나는 나 자신이 완전히 해체되는 걸 보고 있었다.” 고독의 극한에 처했을 때 술은 초월의 길을 일러줬고, 그렇게 나온 소설에는 다른 존재와의 접촉 가능성을 송두리째 잃는 느낌이 고스란히 담겼다. 취기와 에로티시즘은 떼어놓을 수 없는 양극이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는 취기가 야기하는 성적 에너지의 폭발이, 조르주 바타유의 <시체>에는 취기의 관능이 병적이고 혐오스럽게 그려진다. “천천히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 술은 “자신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 가운데 가장 느린 수단”이어서 “상습성 음주는 지연된 자살”에 비유된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술로 인한 자기파괴 과정 전체를 그린 최초의 문학적 시도로 언급된다. 그런데 이런 격렬한 자기파괴의 과정을 스스로 찾아나서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트라클이나 영국의 딜런 토머스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알코올 중독으로 빠져들었다. 왜 “술로 자신을 파괴하는 모든 사람은 위축과 소멸을 경험한다. 그 경험을 통해 비전이 변화된다. 그는 생각의 장벽이 완벽하게 제거됨을, 전통적 범주들이 무너짐을, 모든 모순들이 해소됨을 경험한다.” 그 경험의 대가는 가혹하다. 술은 그 자신이 지옥에 있는지 천국에 있는지조차 구분 못하게 한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시간성을 분석했다. “알코올 중독자는 무감각해진 현재 속에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래는 텅 비었고, 과거는 굳었다.” 게다가 60년대 이후 유행한 각종 환각제가 알코올의 ‘효능’을 대체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는 무능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전락했다. 또 취기는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으며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수시로 측정되며 알코올 분자가 신경 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손쉽게 짚어내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알코올과 예술가, 알렉상드르 라크루아 지음.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펴냄 1만1천원.

사진/ 시인 보들레르는 부르주아적 절제를 혐오했고, 그 탈주의 한 방법으로 알코올을 택했다.
술기운은 시간의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뿐 아니라 몸을 거추장스럽게 하는 인공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래서 술에 취해 쓰는 글은 즉흥적이며 억압적이지 않다. 재즈 연주자들이 즉흥 연주를 하기 전에 술로 흥을 돋우는 것과 같은 방식을 활용한 이는 비트 제너레이션의 성전이 된 소설 <길 위에서>를 쓴 잭 케루악이다. 그는 “글을 쓰고 싶다면 술에 취해 극도의 흥분 상태로 책상에 앉을 것”을 권했다. 술의 ‘부화 기능’을 활용한 또 다른 예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그는 잔뜩 술을 퍼마신 다음날 오전의 숙취를 빌려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책을 술과 더불어 쓴 것과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이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다. <죽음의 병>을 쓸 때는 하루에 포도주를 6리터씩 마셨다. “나는 나 자신이 완전히 해체되는 걸 보고 있었다.” 고독의 극한에 처했을 때 술은 초월의 길을 일러줬고, 그렇게 나온 소설에는 다른 존재와의 접촉 가능성을 송두리째 잃는 느낌이 고스란히 담겼다. 취기와 에로티시즘은 떼어놓을 수 없는 양극이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는 취기가 야기하는 성적 에너지의 폭발이, 조르주 바타유의 <시체>에는 취기의 관능이 병적이고 혐오스럽게 그려진다. “천천히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 술은 “자신을 파괴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 가운데 가장 느린 수단”이어서 “상습성 음주는 지연된 자살”에 비유된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은 술로 인한 자기파괴 과정 전체를 그린 최초의 문학적 시도로 언급된다. 그런데 이런 격렬한 자기파괴의 과정을 스스로 찾아나서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트라클이나 영국의 딜런 토머스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알코올 중독으로 빠져들었다. 왜 “술로 자신을 파괴하는 모든 사람은 위축과 소멸을 경험한다. 그 경험을 통해 비전이 변화된다. 그는 생각의 장벽이 완벽하게 제거됨을, 전통적 범주들이 무너짐을, 모든 모순들이 해소됨을 경험한다.” 그 경험의 대가는 가혹하다. 술은 그 자신이 지옥에 있는지 천국에 있는지조차 구분 못하게 한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시간성을 분석했다. “알코올 중독자는 무감각해진 현재 속에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래는 텅 비었고, 과거는 굳었다.” 게다가 60년대 이후 유행한 각종 환각제가 알코올의 ‘효능’을 대체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는 무능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전락했다. 또 취기는 더 이상 신비스럽지 않으며 인간의 어두운 본성과도 연결되지 않는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수시로 측정되며 알코올 분자가 신경 세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손쉽게 짚어내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