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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디보자…이번엔 누굴 자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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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1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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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만에 재계약 결정하는 오디션 방식에 반기 든 예술단원들…형편없는 처우 개선도 논란

사진/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화려한 무대에 서지만 예술단원들의 처우는 열악하다. (이용호 기자)
“병풍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심사위원들이, 그만 하라고 종을 울릴 때까지 피리를 붑니다. 아~ 올해도 이렇게 끝났구나. 숨을 고르며 돌아설 때 심사위원들끼리 귓속말 주고받는 소리가 뒤통수에 꽂히면 식은땀이 죽 흐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황당한 건 다른 연주단체에 있는 친구들까지 제 오디션 점수를 꿰고 있다는 겁니다. ‘너 올해는 점수 잘 받았다며’라는 식이죠. 비밀심사다, 보안을 지킨다 해도 어차피 심사위원 면면이 빤하기 때문에 다들 알아요.”

“상시 평가제도 도입하자”

“우리는 본래 실기를 하는 예능인들입니다. 1년 내내 여러 가지 정기·기획 공연이 열릴 때마다 무대에 올라 자신의 실력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연말에 딱 한번, 그것도 단 몇분 만에 평가를 해서 재계약을 결정한다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심사위원들이 오디션만 보고 객관적 평가를 내리는 것 같지 않아요. 오디션 전에 단장과 외부 심사위원 사이에 ‘묵계’가 있어 누구를 자를지 사전에 결정된다고 단원들은 생각해요. 오디션이 결국은 ‘연말에 두고보자’식으로 사용되는 꼴이지요.”

사진/ 10분이 채 안 되는 오디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현실에 예술단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이용호 기자)
11월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중앙극장 예술단체노조 사무실. ‘오디션’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사무실에 모여 있던 단원들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말문을 연다. 그만큼 할말이 많고, 또 민감하다는 뜻이다.

창극단·극단·무용단·국악관현악단 4개 단체가 있는 국립중앙극장은 해마다 12월 현장실기평가(오디션)를 실시한다. 시간은 3~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인사평가 점수 총 100점 만점 가운데 70점을 차지하는 중요한 절차다. 나머지 30점은 단체장 평가와 출결상황 등을 매겨 오디션 점수와 합산해 등급을 정하고 75점이 안 되면 계약을 맺지 않는다. 즉, 해고다. 우리나라에선 대부분 국립·시립 예술단체가 이런 오디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지난 8월 결성된 국립중앙극장 예술단체노조가 극장쪽과 9차례 협상을 벌이면서도 좀체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것도 오디션 제도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다.

우상전 노조위원장은 “오디션을 통해 젊은 피를 수혈받는 기회를 마련한다지만, 실제로는 입단한 지 3년 미만의 어린 단원들이 대부분 잘리기 때문에 실질적 의미의 물갈이도 아니다. 1년 내내 무대에 서는 단원들을 상시 평가하는 것이 극장에도, 개인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전국 12곳 국·공립 예술단체노조에서도 오디션 철폐에 대한 필요성이 확산돼 함께 연대해 활동해가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극장쪽은 난색을 표한다. 오디션 비율을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애기엔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정희섭 공연운영과장은 “개인 기량을 평가하는 데는 노조가 주장하는 상시 평가로는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관현악단은 합주를 하는데, 가야금 연주자가 얼마나 연주를 잘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극단에서 소규모 연극을 무대에 올릴 때, 배역을 못 맡은 배우는 아예 평가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개인의 실기능력을 평가하는 데는 오디션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결국 극장은 올해만 한시적으로 단체끼리 협의해 실기·면접·서류 평가를 절충하라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티켓 앵벌이’의 고통을 아시나요

오디션을 둘러싼 갈등은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수십년 동안 되풀이돼온 주제다. 1980년대 KBS교향악단이 국립극장에서 한국방송으로 이관될 때 일이다. 당시 이강숙 감독이 단원들의 기량을 전격적으로 끌어올린다는 명분으로 오디션을 통해 계약을 맺겠다고 나서자 수석 원로들이 집단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엔 일부 단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오디션 제도를 강행했다. 그런가 하면 2년 전엔 세종문화회관노조 간부 9명이 오디션 점수 미달로 해고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낸 결과 “10여년간 근무한 단원들에게 재평가 기회나 스스로 기능 향상을 꾀하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해고한 것은 인사권 남용”이라며 ‘부당해고’ 판단을 내렸다. 현재 세종문화회관은 오디션을 폐지한 상태다.

국립극장에서 단장을 지낸 한 문화계 인사는 “현재 오디션 제도가 문제가 많아 개혁해야 한다는 의견은 단장회의에서도 몇 차례 나왔지만, 극장 집행부쪽 반대로 변화가 없었다”고 말한다. 지금처럼 모든 단원들이 다 오디션을 받지 말고, 근무 연수마다 차등을 두어 계약기간을 늘려주거나 면제해주고, 1년 동안의 공연활동을 점수화해 평가에 반영하자는 것이 개혁의 요지였다. 하지만 그는 “그나마 오디션이 있어 나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대학을 갓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극장의 좁은 문을 뚫고 입단할 수 있다”고 ‘순기능’을 강조했다.

그러나 국립극장 예술단원들이 이렇게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단지 오디션 제도 때문만이 아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화려한 의상을 번쩍이며 초현실적인 무대에 서는 그들이건만, 분장을 지우고 무대 아래서 만나는 현실 또한 만만치 않게 ‘초현실적’이다.

한 단원은 ‘티켓 앵벌이’에 나서야 하는 고충을 토로했다. “공연 전에 단장이 사무실로 불러 티켓을 몇장이나 팔 수 있느냐고 묻지요. 여의치 않으면 10만원짜리 후원회 티켓을 몇장 가져가라고 하죠. 여성단원들은 특히 그런 압력을 못 견디고, 팔라면 다 팔아야 하나 보다면서 부모님 친구, 직장 인맥 다 동원해 150장, 300장까지 돌려요. 주연 맡으면 티켓 배당에 대한 부담은 더 심하죠. 저 같은 경우엔 학교에 찾아가 교수님께 꾸벅 인사하고 학생들에게 표 좀 팔아주십사 부탁했죠. 왜 작품에 전념해야 할 단원과 단장이 티켓 판매에 목숨 걸어야 하나요”

순번을 정해 임신한다고

심지어 여성 무용단원들은 불문율로 정한 ‘가족계획’을 따라야 한다. 남자친구와 몇년째 사귀고 있는 한 단원은 결혼을 계속 미룬다고 했다. “대부분 입단하는 여성들 나이는 적게는 22살, 많게는 26살이죠. 그런데 입단 뒤 3~5년 안에는 결혼하기가 어려워요. 또 결혼한다 해도 아기를 낳으려면 경력 8~9년은 쌓아야 해요. 일종의 ‘내규’이자 ‘관행’인데, 이를 어긴 사람은 이제까지 대부분 알아서 극장을 나갔어요. 입단 뒤 10년, 기량을 가장 꽃피워야 할 때 결혼·임신에 얽매이지 말라는 거죠. 선배들도 어렵게 무용했으니 너희들도 그래야 한다, 이런 식이에요. 심지어 어떤 단장은 이렇게 공언하기도 했지요. “7년차 이상 주역급 이상만 1년에 딱 1명씩 임신 가능하다”고. 그러니 아기 낳으려면 선후배·동료 단원들끼리 서로 의논하며 누가 임신할 것인지 순서를 정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죠.”

단원들 처우는 ‘국립’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다. 공연 전 밤늦게까지 연습해도 본래 시간외 수당이란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규정상 ‘6시간 이상 근무’로 돼 있기 때문에, 6시간을 넘기는 것은 시간외 임금을 지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술단원들은 집단적 창구를 통해 그간의 문제점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그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뤄짐으로써, 단원들의 창작의지를 갉아먹은 열악한 여건이 개선되길 바라는 기대가 노조의 행보에 쏠려 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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