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히로시마를 무대로 옮긴 <맨발의 겐>… 6살 소년의 눈에 비친 원폭 현장의 비극
“기억하고 있나요 57년 전/ 불의 바다 기와조각과 돌의 거리 검은 비 알고 있나요 57년 전/ 히로시마 사라진 거리.”
어린 소년의 눈으로 원폭의 비극을 생생히 담은 뮤지컬 <맨발의 겐>이 온다. 11월21~24일 서울 문화일보홀 무대에 올라 한국 관객과 첫 대면한다.
나카자와 게이지의 만화 원작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이 작품은 그동안 영화(1976), 애니메이션(1987), 뮤지컬(1996) 등 다양한 장르로 각색돼 일본 안팎에서 선보였다. 그 자신이 원폭 희생자인 니카자와가 73년부터 <소년 점프>에 연재한 <맨발의 겐>은 뒷날 10권으로 출간돼 오늘날까지 일본 안에서 500만질이 팔렸다. 뮤지컬(기지마 교오 극본·연출, 기야마 기요시 제작) 역시 1996년 도쿄에서 초연한 이래 지금까지 227차례나 공연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버섯구름에 휩싸인 가족
막이 오르면 오프닝 음악이 끝나자마자 미군 폭격기 B29의 굉음 속에 공습경보를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연일 계속되는 폭격으로 도시는 쑥밭이 되고 패전의 기색은 날로 짙어가는데, 일본 정부는 여전히 국민에게 “죽창 들고 싸울 것”을 독려한다.
주인공인 6살 소년 겐의 아버지 다이키치는 전쟁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평화주의자다. “젊은이는 전쟁터에 보내지고 죽는다. 개죽음이지. …사람은 타인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해야 된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용기지.” 하지만 일본 열도를 휩쓰는 광기 속에서 이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는 ‘비국민의 헛소리’로 찍힐 따름이다.
주변의 질시와 가난 속에 허덕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겐의 가족. 평화를 바라던 그들에게도 ‘그날’의 비극은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8월6일 아침 8시15분. 무대와 객석 전체에 번쩍 하며 흰 섬광이 덮친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큰 폭발음과 바람소리가 울린다. 무대 가득 버섯구름이 피어난다. 붉게 물든 무대 뒤편에선 원자폭탄에 살점이 흐물흐물 녹은 사람들이 유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천천히 지나간다.
겐은 아버지와 누나, 남동생을 한꺼번에 잃고 어머니와 함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도시는 아비규환. 돈을 벌기 위해 겐은 폭탄상처로 온몸에 구더기가 끓는 환자를 돌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여러 번 밟혀도 씩씩하게 자라나는 보리처럼” 겐은 ‘맨발’로 시련을 이겨낸다.
다양한 마임과 춤… 동심의 생명력 담아
무대는 망사로 된 막과 슬라이드를 제외하면 별다른 장치를 쓰지 않는다. 스펙터클한 이미지 대신 공연을 내내 이끌고 가는 것은 검은 옷차림의 배우들이 펼치는 다양한 마임과 춤이다. 순간순간 서릿발을 이겨내고 자라나는 보리가 되고, 잉어로 변해 연못 속에서 뛰놀다가, 거리에서 나뒹구는 시체들의 원혼을 표현하기도 한다. 겐과 동생 신지 역할을 맡은 두 배우는 극 내내 맨발로 무대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어린이다운 약동하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맨발의 겐>은 피폭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으나 패전 이후 일본인이 가진 피해의식으로까지 연결짓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쟁 말기 ‘옥쇄’를 부추긴 군국주의가 원폭을 비롯한 참화를 불렀다고 본다.
만화는 탄탄한 스토리 속에 주제의식을 뚜렷하게 형상화한 탁월한 작품이지만 한편으론 얼굴 한가득 유릿조각이 박히거나 살점이 뚝뚝 떨어지는 식의 사실적 묘사가 너무 끔찍해 페이지를 차마 넘기기 어려운 이도 있었을 것이다. 뮤지컬 무대는 상징적인 묘사가 많아 이보다 순화된 인상을 준다. 공연은 자막 대신 무료로 제공되는 동시통역기를 이용해 관람할 수 있다. 평일 7시30분, 토 3·7시, 일 3시(문의 02-742-9882).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일본의 인기 만화를 뮤지컬로 옮긴 <맨발의 겐>. 무료 제공되는 동시통역기로 관람의 편의를 도모한다.
막이 오르면 오프닝 음악이 끝나자마자 미군 폭격기 B29의 굉음 속에 공습경보를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연일 계속되는 폭격으로 도시는 쑥밭이 되고 패전의 기색은 날로 짙어가는데, 일본 정부는 여전히 국민에게 “죽창 들고 싸울 것”을 독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