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도우미로서의 과학
등록 : 2002-11-13 00:00 수정 :
어느 대감집에서 귀한 물건을 도난당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내부자의 소행이 분명했다. 고을 원님은 궁리 끝에 하인들을 불러모은 뒤 똑같은 길이의 명주끈을 나눠줬다. 그러고는 “이것은 도둑을 잡는 신통력 있는 끈이다. 오늘밤이 지나면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의 것은 그대로이되 도둑의 것은 한치만큼 길어진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끈을 모아 살펴보니 그 가운데 하나가 한치만큼 짧았다. 물건을 훔친 하인이 밤새 그만큼 잘라낸 것이었다.
다음으로 한 순박한 농부에 관한 것을 보자. 그는 집안에 우환이 생겨 돈이 필요했기에 닭을 몇 마리 들고 장터로 갔다. 하지만 장사를 해본 적이 없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기만 했다. 마침 한 닭장수가 도와준다고 나서 “여기 내 닭장에 넣으시오. 이따 다 팔리면 돈을 주겠소”라고 했다. 그러나 닭은 다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농부는 자기 닭 가운데 팔린 것은 돈으로 주고 팔리지 않은 것은 되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닭장수는 농부의 말을 들어주기는커녕 처음에 맡긴 사실조차 부정했다. 결국 두 사람은 원님 앞으로 가서 시비를 가리게 되었다. 원님은 먼저 닭장수에게 무엇을 먹이느냐고 물었더니 여러 가지 잡곡을 먹인다고 했다. 그러나 농부는 집안이 가난해 수수밖에 못 먹였다고 대답했다. 이를 들은 원님은 남은 닭 가운데 농부가 가리킨 닭을 한 마리 잡도록 했다. 거기서는 수수만 나왔다.
예전에는 이처럼 명판결이란 것이 많았다. 그런데 명판결이란 말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증거 부족에 허덕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특히 처음 얘기는 이른바 ‘사후 증거’에 의한 것으로서 오늘날 흔히 말하는 ‘함정 수사’와도 통한다. 이에 비해 둘째 얘기에서는 직접적 물증을 찾아냈다. 여기서의 초점은 그런 물증을 확보하는 데서 현명한 원님의 지혜가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예들은 명판결이란 말이 나올 만큼 예외적이다. 대부분은 심증이니 방증이니 하는 다른 증거에 많이 의존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다행이다. 증거를 확보한답시고 별의별 비과학적인 테스트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러한 비과학적 증거 확보 수단의 절정은 고문이다. 고대 이래로 수많은 고문을 통해 자백이라는 증거를 얻었다. 그러고는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궤변으로 이를 합리화했다.
이제 자백은 더 이상 증거의 왕이 아니다. 오늘날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사실이라도 법정에서 부인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증거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최근 수사기관에서의 고문 때문에 한 피의자가 숨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검사를 구속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데 우리 사회에서 인권은 곳곳에서 위협받는 가냘픈 꽃과 같다. 근래 들어 인권의식이 높아지고 시민단체 등의 도움도 있어 한층 든든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과학이야말로 궁극적인 인권 도우미다. 사실 오늘날까지 인권 발달의 역사는 과학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요즘에는 머리카락 한올, 피 한 방울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피부 부스러기만으로도 증거가 된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한 사형수가 무죄 석방되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인권 보호에서 도덕 및 법의식과 함께 과학적 사고의 의식도 더욱 증진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