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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부방이 필요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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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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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성매매 반대 거리캠페인 때문에 빌린 책상을 낑낑대며 성당 식당으로 원위치해놓으러 들어서니 캠페인에 함께한 베로니카 수녀님이 어느새 아이들 받아쓰기 채점에 골몰해 있다. 얼른 채점 받고 간식 먹을 요량으로 가득 찬 아이들은 수녀선생님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허기 달래줄 고소한 음식냄새에 몸도, 마음도 동한 듯하다. 초등학교 3~4학년쯤 돼보이는 한 아이는 동화책을 더듬더듬 읽어나가고, 돌살박이 아이를 어르며 30대의 여성 자원봉사자가 번번이 틀린 글자를 다듬어준다.

요사이 성당에 물건 빌리러 드나들며 눈인사를 마친 아이들이다. 학교 끝나고 다른 아이들 학원간 사이에 일찌감치 성당마당 한켠을 차지한 아이들은 공부하는 날인 수요일·토요일말고도 제집 마당삼아 놀이에 열중한다.

“성당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없고 영광읍에 사는 아이들이에요. 열댓명 정도 됐는데 4명은 며칠 전에 결국 시설로 들어갔어요.” 아빠는 알코올 중독이고 엄마가 겨우겨우 생활을 이어갔는데 그나마 엄마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야 할 지경이 되자 아이들이 시설신세를 지게 됐다는 수녀님의 설명이다.

같은 시설에 있을 정화·정호가 퍼뜩 생각난다. 엄마, 아빠, 거기다 삼촌까지 몽땅 알코올 중독자고, 밥을 끓여먹기나 하는지 싶을 정도로 온기가 없는 거지굴 같은 집에서 살던 아이들이다. 술을 달고 사는 부모 덕()에 동네사람들은 접근조차 어려웠고, 점점 나쁜 짓이 남매의 몸에 익어가 안타까웠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난해 엄마가 술에 취한 채 길에서 얼어죽자 아빠와 삼촌은 어디로 간지도 모르고 남매는 시설에 맡겨졌다. 정화·정호는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수녀님들도 아이들의 학습능력을 더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공부방이 아니었다. 아직도 한글을 떼지 못한 아이들과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그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만 돼도 괜찮겠다는 게 수녀님들의 욕심이다.

“제가 알고 있는 아이들만도 많아요. 그런데 시골이라 그런지 자원봉사해줄 사람이 없어서 손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주변에 일반대학이 있으면 자원봉사자 구하기가 수월할 텐데…”라며 자신의 아이들 2명을 데리고 다니며 수고해주는 봉사자에게 고마운 말을 잊지 않는다.

우리 지역엔 저소득 또는 한 부모 아이들을 위한 무료 공부방이 없다. 대부분 학원이나 과외로 내몰리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부모가 오히려 짐인 아이들에겐 방과후의 시간이 무료할 뿐이다. 농촌지역 공부방에 관심이 있는 터라 성당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가슴에 남았을까 식당 앞에서 조잘대다 낯선 사람만 보면 큰 소리로 인사하던 아이들의 남루한 입성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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