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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희생의 소를 탕으로 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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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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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농제에 바친 소로 우려낸 뽀얗고 진한 국물… 한양설렁탕집에 들러 설렁탕의 역사를 생각해보라

서울에서 30여년간을 꾸준하게 이어온 만큼 한양설렁탕집의 국물은 남다르다. (김학민)
가끔 텔레비전의 인기 사극을 보면 포졸들이나 지방 구실아치, 또는 돈 많은 장사치들이 주막에 묵으면서 술 한동이를 거르고 대뜸 너비아니 안주를 시켜 호탕하게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으로 옛날에도 주막에 가면 요즘처럼 각종 고기안주가 즐비해 하룻밤 과객들의 전대를 풀게 하는 것 같지만, 너비아니 등 쇠고기에 관한 한 이 장면은 우리나라 소 식용의 역사와 당시 육류의 유통·보존 조건을 살펴보면 상당히 부풀려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는 식용 이전에 농경에 긴요한 동력이었고, 이전에는 제사의 희생용 동물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부여에서 소는 육축의 하나로 관직명에 이름이 들어갈 정도로 중요했다. 그러나 <신당서> 변진조를 보면, 변한·진한에서는 소를 사육했으나 단지 장례용으로만 이용했고, 백제에서는 우마를 타는 것을 알지 못해 순전히 순장용으로 쓰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농경의 발달에 따라 소가 밭갈이에 이용되면서 중요성이 커졌으나, 삼국시대 고구려를 통해 이 땅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소의 식용은 아주 제약되었다. 불교의 오계 가운데 첫 번째가 살생의 금단이었으므로 당시 대다수 백성이 불교도인 상황에서 소의 육용은 극히 일부에서만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의 법흥왕과 성덕왕은 살생을 철저히 금지했고, 백제의 법왕은 가축의 도살은 물론 사냥용 매와 새매를 기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물고기를 잡는 어로도구조차 불태워버렸다.

1123년 고려에 온 송나라 사절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에서는 일부 상류계급만 육류를 먹을 뿐 일반 백성들은 살생을 꺼렸으므로 가축의 도살법이 매우 서툴렀다고 적혀 있다. 조선에 들어와 숭유배불정책으로 금살생의 굴레가 풀리고 식육을 권장했으나, 유교의 인의사상과 영농상의 중요성으로 소의 육용은 크게 보급되지 않았다.

설렁탕은 제사 때 희생으로 쓴 소를 삶아 그 참여자들이 일종의 음복으로 먹은 음식이었다. 인류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는 것이 선농제인데,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태조 이래 역대 임금은 경칩 뒤 첫 해일(돼지일)에 소를 잡아 풍년을 기원하며 이 제사를 지냈다. 역대 왕은 선농제를 지내고 나서 제단인 선농단 남쪽의 밭을 친히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의 중요성을 알렸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 때 제수로 쓴 소의 머리·다리·뼈·내장 등을 모두 넣고 오랜 시간 백숙으로 푹 고았는데, 이 국물이 뽀얗고 짙다 하여 설농탕(雪濃湯)이라 불렀다고 한다. 왕의 친경이 끝나고 나면 가마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해 설렁탕에 말아 제사에 참여한 왕과 문무백관,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함께 나눠 먹었으니, 설렁탕은 곧 국가의 제사음식인 것이다. 선농제에 참여한 신하가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해서 널리 펴시니 / 사물이 성하게 일고/ 만복이 고루 펼치나이다”라고 왕에게 바친 시도 있다.

설렁탕은 대표적인 서울 음식이다. 그러므로 서울에는 아주 오래된 설렁탕집들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마포의 한양설렁탕집(02-712-9526)도 한번 소개할 만하다. 같은 자리에서 아버지가 20여년간 설렁탕집을 운영해오다 연로해 둘째아들 백성현(39)씨에게 물려줬는데, 백씨가 운영한 지도 벌써 9년째니, 상전이 벽해되는 서울 하늘 아래서 30여년간을 꾸준하게 이어온 식당도 그리 흔치는 않다.

한양설렁탕집의 사골과 머리뼈로 푹 곤 국물은 참으로 고소하기 짝이 없는데, 뚝배기에 밥 담아 토렴(밥을 데우기 위해 국물을 여러 번 붓고 쏟고 하는 것)하고, 국수 한 사리, 편육 몇점 넣어 국물 부어내면 소주 몇잔과 함께 썰렁한 이 가을 움츠러든 몸이 활짝 펴진다. 같은 재료, 같은 솜씨로 같은 맛을 내는 수원 인계동의 마포설렁탕집(031-235-4455)은 성현씨의 형 현규(42)씨가 운영하고 있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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