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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혹의 몸짓 ‘로만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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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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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포르노]

일본 영화계 ‘육체노선’의 산물… 풍속산업에 밀려 도심 뒷골목으로

얼마 전 막을 내린 ‘2002 광주국제영화제’(10월25∼31일)에 대한 기사(<한겨레> 10월22일치)를 읽다가 그만 눈이 번쩍 뜨였다. 영화제에서 ‘니카쓰 로만포르노’의 걸작들을 특별상영한다는 기사 때문이었다. 1971년 11월 <단지처/오후의 정사>로 막을 올렸고, 88년 <여신들의 미소>로 고별을 고한 스무해 가까운 세월은, 세계영화사상 유례없을 한 영화사의 한 장르에 대한 집요한 집착과 애증의 기록이었다.

격변기 일본 영화의 핑크빛 돌파구


사진/ 로만포르노의 걸작들. <다다미방 이불 속><빨간 머리여자><다락방의 산보자>(왼쪽부터).
‘포르노’란 알다시피 남녀배우가 홀랑 벗고 나와 성행위를 진하게 하는 영화를 가리킨다. 당시 경영난에 시달리던 일본 5대 메이저 영화사의 하나이자 ‘일본활동영화’에서 명칭이 유래한 니카쓰는, 위기를 모면할 방책으로 관객이 몰릴 것이 확실한 야한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고 그동안 점잖은 영화나 문제작(일본 리얼리즘 영화의 위대한 승리라고 일컫는 <전쟁과 인간> 시리즈 같은)을 낸 영화사에서, 내놓고 ‘우리는 이제부터 포르노한다’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리고 기존의 ‘핑크 영화’와도 구별할 필요성이 있어서 고민 끝에 격조 있고 ‘로맨틱한 포르노’ 영화란 뜻으로 ‘로만포르노’란 새로운 단어를 만들었다.

니카쓰의 변신을 주도한 이는 흥미롭게도 당시 노조위원장으로 있던 네모토 데이지였다. 뒷날 임원을 거쳐 사장까지 오른, 도쿄대학 출신의 감독인 그는 한때 일본공산당의 영화계 세포로 여겨진 인물이었다. 일본식 노사협조와 좌우합작의 산물인 로만포르노의 첫 작품 <단지처/오후의 정사>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주부들의 불륜을 다룬 것으로, 아파트 건설붐이 불던 70년대 초반의 일본사회를 배경으로 한 수작이었다.

70~80년대까지 일본의 영화사는 방송사 같았다. 배우와 감독 등은 영화사로부터 월급을 받는 하나의 직장인이었다. 회사가 위기에 놓이자 스태프들이 주축이 된 노조가 앞장서 타개책을 내놓은 것이었다. 고육지책의 산물로 로만포르노를 찍기 시작하자 영화에 얼굴이 나오지 않는 스태프들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는 호기심이 발동했고, 체면상 좀 그렇다면 예명을 하나 만들면 되었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정작 문제는 스크린에서 어디 숨을 곳이 없는 배우들이었다. 특히 배우로서 연기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중년의 남자배우들에게는 영화사의 새로운 방침인 ‘육체노선’이란 정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다케하시 아키라라는 남자배우는 자기를 키워준 회사에 보답한다는 각오로 망설이다가 옷을 벗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배우에게 다가갔다. “역을 맡는다는 게 진짜로 무얼 한다는 게 아니지. 야쿠자를 맡으면 스크린에서 여러 사람을 죽이잖아. 그에 비하면 아이를 만드는 연기는 나쁠 게 없잖아”라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작품들

사진/ 여배우와 이야기하는 구마시로 다쓰미. <이치조사유리>,<다락방의 산보자>(왼쪽부터)
‘끝’자 나오고 극장에 불이 켜진 다음에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이들은 잘 알겠지만, 영화 하나 만들려면 무수한 이들의 이름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은 단 두명의 이름만 기억한다. 감독과 주연배우. 로만포르노를 언급할 때도 두명의 이름만은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전설의 거장 구마시로 다쓰미와 여배우 시라가와 가즈코.

정식으로 연극수업을 받았고 로만포르노 데뷔 전에 200여편이 넘는 핑크 영화에서 주연과 조연을 맡은 시라가와는 그야말로 준비된 ‘로만포르노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단지처…> 시리즈에서 불완전 연소된 욕구 불만의 주부를 열연해 관객의 뜨거운 눈길을 한몸에 받았다. “당신, 난, 아직인데” 하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감독 구마시로는 <이치조 사유리/젖은 욕망> <연인들은 젖었다> <빨간 머리 여자> <다다미방 이불 속> 등의 걸작을 연이어 발표해 로만포르노를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격찬을 받았다.

남녀 간의 정사를 소재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채로운 스타일로 그려낸 니카쓰 로만포르노는 80년대 들어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니카쓰가 공식적으로 노선 변경을 선언한 탓도 있지만 비디오의 보급으로 더 이상 극장용 포로노가 설자리가 없어진 게 주요인이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른바 ‘풍속산업’이라 불리는 섹스산업이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간접체험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진짜 이유일지 모른다.

도쿄의 도심가 뒷골목에는 흘러간 니카쓰 로만포르노를 상영하는 극장이 아직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갈증난 욕망을 매혹적인 몸짓으로 애무하던 여배우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객들은, 그 여배우들이 지금쯤 먹었을 나이와 비슷하거나 더 먹은 늙어가는 아저씨들뿐이다. 나이든 욕망을 지켜보는 심정이란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다채로운 정사… 간접체험의 한계

사족이지만 예전에 유학 중이던 후배가 술자리에서 “선진국엔 다 있는데 한국에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공산당과 포르노 극장”이라고 답해 한참을 웃었다. 80년대 후반의 어느 날이었다. 그 뒤로 15~16년이 지났지만 이 땅에는 그 두 가지가 여전히 없다. 어쨌든 사회당도 성인극장도 있는 마당이기에 뭐 그리 유감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대한민국은 참, 건전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나라다운 나라는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진자료: 광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제공)

도상학연구가 alha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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