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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일하고 싶은 장애 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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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1-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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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한 남자가 쭈뼛쭈뼛 사무실로 들어오며 어눌한 말투로 박카스를 몇병 건넨다.

누군가 찾는 눈치더니 지난번에 들렀을 때 좋은 말씀 해주신 게 생각나서 지나는 길에 박카스를 전하려고 인사차 왔다는 더벅머리 총각은 느리게 입을 떼면서 대뜸 묻는다. “간질병이 유전되느냐”고. 면접보는 학생처럼 유전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치료제가 많이 나와 한결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내놓자 한숨바람이다.

군복무 중 갑자기 찾아온 증상으로 뇌수술을 3번이나 받고 나서도 왜 내게 병이 생겼는지 궁금했던 총각은 한달 전 우리 사무실에 와서 간질이 유전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단다.

수술하고 나서 엄마도 잘 알아보지 못했고 얼굴 생긴 모양까지 변해버린 총각은 세상에 버려진 것 같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부모에 대한 원망이 형제에 대한 서운함으로까지 번진다. 단지 질병만이 아닌 정신적인 혼돈을 심하게 겪고 있는 총각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일자리였다. 가끔 마을사람들 농사일 거들어주고 받는 20만~30만원이 한달 수입의 전부라는 총각은 온통 일해서 돈벌고 싶은 맘뿐이다.

“한번 놀아보세요. 노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우리 같은 사람은 죽고 싶어도 안 되데요”라며 상한 마음을 가누고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우리 지역만 해도 인구 7만명에 장애우가 3천여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정신장애 또는 정신지체를 앓는 장애우는 200~250여명 정도다.

그러고 보니 총각처럼 대책 없이 시골의 늙은 부모에게 맡겨진 어른이나 아이들을 심심찮게 겪게 된다.


시골로 내려와 첫 농사를 지었던 마을에도 정신장애를 가진 40이 훨씬 넘은 아저씨와 열네댓살의 정신지체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결국 여자아이는 어느 해 여름 불어난 동네 앞 개천에 빠져 하루를 꼬박 물 속을 뒤진 끝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5년을 한 마을에서 살았던 나산댁 큰딸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 정신이상을 보여 친정엄마에게 맡겨졌고 사위가 가끔 들러 생활비라도 챙겨주는 것이 고맙다며 눈물바람이곤 했다. 콤바인 작업할 때 논 한쪽에 쪼그리고 않아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비오는 날이면 한없이 동네를 쏘다니다가 악을 쓰며 살림을 내던져 농사일에 지친 어미 가슴을 무던히 태우기도 했던 큰딸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까 늙은 어매 혼자 짓는 농사에 설움도 많을 거라며 농약 몇번 쳐주었다고 볼 때마다 고마워하던 나산댁은 얼마나 늙었을까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도 초등학교 다니던 애란이는 보통아이들보다 지능이 낮아 저보다 어린 동네아이들에게도 구박덩어리였다. 먹고살기 바쁜데 애물단지라는 말만 안 들어도 다행이다 싶더니 중학교도 못 가보고 교통사고로 몇년 전에 세상을 등졌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장애우들에게 혈연공동체 인심이 방패막이가 되기도 하지만 논과 밭, 산과 들, 농기계, 장애자식을 둔 부모의 죄의식, 편견 등은 위험한 환경이 되기도 한다.

거기에 힘겨운 농업노동과 빠듯한 살림에 허덕이는 부모들이 이들을 제대로 돌보기 어렵다. 그저 좋은 공기와 주변환경에 건강을 맡길 뿐이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일이라는 총각의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으로 아무리 꽁수를 돌려봐도 취직을 부탁해볼 만한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박카스 받아먹기가 미안해 다시 들려보내려니 화를 내며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 총각에게 면목만 자꾸 없어질 뿐이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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