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자취를 포착한 현대미국 사진전… 다양한 실험 보여주는 역사적 작품들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여행을 하거나 아니면 일상의 모습을 담아두기 위해 손에 카메라를 들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말이면 카메라나 작은 캠코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귀여운 아이와 가족의 일상을 기록하는 자상한 가장의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카메라를 들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는 사람의 눈에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세상보다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일상 속에 생활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카메라와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진·영상의 이미지는 이미 많은 분야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특히 시각예술의 영역인 미술에서는 19세기 중반 실용적인 사진 매체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미술 개념에 대한 구조적 지각변동이 뒤따랐다. 외부 세계의 재현에 근거를 둔 전통적인 미술창작 행위에 근본적 위기를 맞은 것이다. 실제 세계를 정확하게 재현하는 사진의 기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며, 현대회화는 그 자리를 사진에 내주고, 추상미술로 궤도를 바꾼다. 여기서 흔히들 미술과 사진의 경계를 묻고, 나아가 실제와 예술의 경계를 되묻는다. 실재하는 한 순간을 인화지 위에 고정시킨 사진의 이미지는 흘러가는 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켜 실재와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것은 실재와 재현에 대한 철학적·미학적 논쟁으로 무수한 사유 대상이 되어왔다.
현실·정체성·일상 등 주제로 당대 조망
그런 현대사진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동시대적 의미를 찾는 전시가 지난 10월25일부터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미국현대사진 1970∼2000’전이 그것인데, 신디 셔먼, 리처드 프린스, 로버트 메이플소프, 낸 골딘, 샐리 먼 등 미국의 현대사진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 113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사진 매체의 예술적 가치에 일찌감치 주목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꾸며졌다. 전시는 19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30년간의 현대사진을 현실(the real), 정체성(identity), 일상(the domestic)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조망하고 있다. 이 주제들은 사진뿐만 아니라 현대예술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테마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실재하는 세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표본으로 여겨진다. 1970년대 사진작가들을 가공의 현실을 만들어내거나, 현실에는 있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창조하거나, 기존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비전통적 방법으로 사진이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셰리 르빈은 전통적인 사진을 의도적으로 모작하여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를 묻는 작업으로 본격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샌디 스코글런드는 실재하지 않는 강렬한 색채와 초현실적 이미지로 구성사진 또는 연출사진이라 불리는 사진의 뉴웨이브를 주도했다. 여기서 사진은 허구의 세계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1970년대 이후, 즉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시기는 성·민족·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러한 반성은, 모든 정체성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축되는 것이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다. 페미니즘, 소수인종과 민족에 대한 문제, 동성애적 취향 등이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정체성의 문제를 작품의 주제로 다루게 된다.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은 자화상을 사진으로 찍은 낸 골딘의 작업은 작가 스스로가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개인적인 삶을 좀더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희망을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를 비롯하여 통속적인 대중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신디 셔먼의 작업은 현대사회 속에서 여성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영화 속의 정형화된 여성인물로 끊임없이 옷을 갈아입는 신디 셔먼의 모습은 대중매체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통해 상투적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의 정체성을 반복적으로 그려낸다. 노골적인 동성애를 주제로 하여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 메이플소프나 할리우드 광고판 앞에서 낯선 이방인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쳉퀑치는 미국 내 소수집단인 동성애자, 소수민족의 정체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대의 기록자가 되고 싶지 않은가
전통적 가족의 개념이 붕괴된 현대사회에서 가정의 일상사는 작가들의 관심을 환기하는 대상이 된다. 이제 더 이상 사진은 기념할 만한 순간이나 장엄한 풍경을 담는 것이 아니라 황폐해진 환경이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을 기록하는 도구가 된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자신의 아이들을 촬영한 샐리 만의 사진은 아이들을 향한 관능적인 시선으로 아동학대의 문제를 제기한다.
많은 작가들과 비작가들이 붓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예술적 언어를 구체화하는 현실에서 사진의 미학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아무런 조작 없이 포착하는 스트레이트사진과 작가가 원하는 이미지와 형상을 만들고 연출하는 구성사진 등 현대사진은 다양한 실험으로 풍부해지고 있다. 사진은 매체적 특성으로 포스트모던적 미학논쟁의 핵심이 되어왔으며, 그러한 논의가 1970년대 이후의 현대사진의 전개에 결정적인 기점이 되기는 했으나, 사진 매체의 자생적 강점은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고 조작과 복제가 용이하다는 대중성에 있다. 이번 사진전이 포스트모던의 사변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난점이 있음에도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것은 사진이 분명 현대 예술언어의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혁혁한 공헌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주말을 맞아 카메라를 들고 가족 나들이를 나섰다면 다채로운 가능성으로 우리의 시각영역을 넓혀준 현대사진의 걸작들을 찾아볼 만하다(문의: 호암갤러리 771-2381∼2).
권영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객원연구원 yjkwon@hotmail.com

사진/ 쳉퀑치 <캘리포니아주 헐리우드 언덕> (1979).

사진/ 낸골딘 <구타당한 낸, 성적 종속물에 관한 발라드 중에서>(1984).

사진/ 셰리 르빈 <워커 에반스 모작>(1981).

사진/ 샌디 스코글런드 <결혼>(1994).

사진/ 로버트 메이플소프 <난초>(19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