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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니들이 로마네 꽁띠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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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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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오해… 한옥의 정취와 포도주를 함께 즐기는 ‘로마네 꽁띠’

사진/ 로마네 꽁띠의 포근한 정취는 가을에 더 빛을 발한다.
“어젯밤에 OO호텔 바에서 친구하고 로마네 꽁띠 두병을 비웠는데, 역시 좋은 술은 다르더군. 아침에도 개운해!”

요즈음 명품 찾고 최고급 찾는 좀 있다는 자들이나 잘난 체하는 자들 사이에서 위와 같은 대화는 그리 낯설지 않다. 로마네 꽁띠는 어떤 포도주인가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다. 프랑스 동북부에 있는 부르고뉴 지방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면 정도에 해당하는 본로마네에서 수확한 포도로만 양조하는 포도주가 로마네 꽁띠인데, 품질은 최상급이지만 생산량은 1년에 6∼7만병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2000년산 로마네 꽁띠의 경우, 프랑스 현지가격으로 1병에 130만원이나 될 정도니,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조차 평생에 한잔을 마셔보기는커녕 구경도 못 해보고, 심지어 그런 포도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

프랑스에서 포도주는 술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퇴근한 뒤 친구들과 어울려 한잔 걸치는 소주와 같은 술이 아니라 식사와 함께 나오는, 요리를 즐기는데 필수적으로 끼어드는 하나의 음료로 생각하면 된다. 음료로서의 포도주는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해 마시는 애피타이저용, 본 요리를 먹을 때 마시는 메인 디시용, 그리고 본 요리를 먹고 난 뒤 소화를 돕고 입 안의 음식 냄새를 없애기 위해 마시는 디저트용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바꿔 마시거나, 마른안주 놓고 우리 식으로 아무거나 서너병씩 포도주를 비우는 프랑스인은 한명도 없다.

좀 과장해 우리 한식에 비유하면, 애피타이저용 포도주는 식사 전에 몇 숟가락 떠 새콤한 맛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이게 하는 물김치요, 메인 디시용 포도주는 밥이 술술 넘어가게 하는 국이요, 디저트용 포도주는 식사 뒤 입 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감주나 수정과인데, 이것들을 뒤죽박죽 바꾸거나 섞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요리를 시키지 않고 포도주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디저트용 포도주를 한두잔 더 마셨을 수는 있을 것이로되, ‘술’로서 포도주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술은 처음도 끝도 코냑이다. 그리고 코냑은 ‘술’이기 때문에 요리 없이 마신다.

나는 우리의 양주 문화를 생각하면 천민의식·허위의식을 떠올린다. 무조건 비싼 술, 무조건 오래된 술을, 무조건 많이 마시는 것으로 자기의 부와 특권의식을 과시하려는 천박한 음주 문화에 요즈음 포도주도 한몫 거들고 있는 것 같다. 몇년산 포도주 하며 거들먹거린다. 오래된 포도주는 희귀성으로 인해 값은 나갈지 모르나 질과는 관계가 없다. 그 해의 일조량과 양조 기술이 포도주의 질을 결정지으니 수십년 된 것보다 2, 3년 된 포도주가 더 질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로마네 꽁띠 하며 발음도 잘 안 되는 유명 상표를 외워 비싼 포도주들을 찾는다. 그러나 로마네 꽁띠는 메인 디시용 포도주니, 앞의 비유대로 하면 마른안주 놓고 국 두 대접 훌훌 마시는 격이다.


안국동에 가면 아주 예쁜 와인집 로마네 꽁띠(02-722-4776)가 있는데, 낭만파 산악인 박인식씨가 지난 7월에 문을 열었다. 아담한 한옥을 원형 그대로 살려 수리했다. 마당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한적한 산사나 어느 섬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서양 포도주의 감미로움과 한옥의 포근함이 잘 어울린다. 로마네 꽁띠에는 로마네 꽁띠가 없다. 그리고 수천년을 거쳐오며 정립된 유럽의 ‘음식 문화 속의 포도주 문화’의 내용과 형식과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집만의 포근한 정취는, 이 가을 따뜻한 가슴을 나누려는 사람들에게 그 아쉬움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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