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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유방암이 지혜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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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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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긴 터널을 뚫고 나와 유방암 환자들을 위해 자원봉사하는 김외련씨

필름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엑스레이 판독대 위에 걸렸다. 의사가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별 이상은 없네요. 그런데 앞으로 정기검진을 해보는 게 좋겠네요.” 이상 없다는 말이구나! 나는 얼얼한 기분으로 진찰실을 나왔다. 난생 처음으로 유방암 검진을 하느라 긴장했던 것이다. 만약 엑스레이 사진에서 ‘이상 있음’이라고 나왔다면 슬플까 충격일까 믿을 수 없겠지. 온갖 복잡한 심정이 되면서 김외련씨가 떠올랐다.

“체험을 통해 희망을 주고 싶어요”

사진/ 병원을 찾은 이들과 상담하는 김외련(왼쪽)씨. 그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유방암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봉사자이다. (류우종 기자)
김외련(58)씨는 국립암센터에서 유방암 환자들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마 누구보다 진심으로 유방암 환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봉사자일 것이다. 그도 유방암 환자였기 때문이다. 암의 긴 터널을 뚫고 나온 지 6년이 다 돼간다.


“체험을 통해 유방암에 걸린 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조기검진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싶어요.” 나이보다 젊어보이는 그는 암이란 고통을 겪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김외련씨는 자신의 경험이 부끄럽다고 털어놓는다. 약사 출신인 그가 유방암에 대해 무지했다는 말이다. 그가 유방암 검진을 처음 받은 건 쉰이 넘어서였다.

“사람들 거의 그렇겠지요. 나는 그런 것하고 상관없이 살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남의 일이려니 하면서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육체에 대해 자만했던 거죠.” 더욱이 그는 평소 매우 건강했다. 젊을 적부터 테니스로 몸을 단련하고 매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 즐겁게 생활했다. 그래서 건강검진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것이었다. 우연히 유방암 검진을 했는데 처음에는 오진으로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별 이상이 없다기에 안심했어요. 그런데 몇 개월 뒤 아무래도 이상해서 큰 병원으로 가서 받았더니…. 사실 처음에 제대로 검사 결과가 나왔다면 상태가 달라졌을 거예요.” 그의 유방암은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유방암 진행단계가 0기에서 4기까지니 가벼운 상태는 아니었다. 수술을 했지만 재발에 대한 걱정도 컸다.

“보통 1년 안에 재발률이 50~90%나 되거든요. 재발의 공포는 엄청나게 커요. 거기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수술 뒤 그는 방사선 치료와 호르몬 치료를 병행했다. 그러나 1년 만에 암은 재발했다. 다시 고용량 요법으로 치료를 했다.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5년 전만 해도 그런 치료법을 썼다. 보통 치료보다 몇배나 힘든 치료였고, 재발하면 2년 내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할 만큼 심각한 방법이었다. “죽음에 대한 준비도 함께 해야 했어요.”

가장 훌륭한 스승은 죽어가는 사람

그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정양(靜養)생활을 하며 느낀 점이 어디 한두 가지랴. “자기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길이기도 했지요.”

그는 올해 초부터 국립암센터의 유방암 센터에 나와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서울 시내 한 병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했다. “암에서 해방된 뒤 주위를 둘러보게 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이 일을 하기로 한 거죠.”

얘기 내내 웃음을 잃지 않는 그에게 진찰실에서 나오던 부인들이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지금 주사 맞으러 가는 길인가요 다녀와서 저랑 얘기해요!” 김외련씨가 건네는 쾌활한 인사말에 우울한 환자의 표정이 순간 활짝 피어났다. 김외련씨의 손에 작은 수첩이 쥐어 있다. 상담을 하며 필요한 사항을 그때그때 적어둔다.

환자들과는 주로 무슨 얘기를 하나요 “면역 기저를 최상으로 하는 방법, 다이어트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등 그런 얘기를 하죠. 저는 무엇보다 삶의 질을 얘기해요. 유방암에 걸렸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게 아니거든요.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라고 권해요. 예컨대 재발에 대한 불안, 죽음의 공포에 둘러싸여 10년을 사는 것보다 마음을 평화롭게 먹고 평소대로 살 수 있는 절반의 인생이 훨씬 값진 거 아니겠어요.”

그의 투병생활에서 남편과 세 자녀는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모든 환자는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환자는 가족과 숨바꼭질을 한다는 말이 맞아요. 스스로 병과 싸우는 고통 중에도 가족에게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못하거든요. 환자는 가족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오히려 더 마음을 터놓게 돼요.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얘기가 되거든요. 다른 이들과 만나면 주파수가 안 맞지요.” 김외련씨는 화요일마다 나와서 환자들과 만난다.

“환자들이 대부분 좋아해요. 열에 한두명을 제외하면 모두들 마음의 문을 열지만 사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사람들이 다 다르니까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죠. 나이가 든 분들은 병에 대한 수용태도가 성숙한 편이에요. 그런데 아직 젖 먹는 아이가 있는 젊은 엄마가 암에 걸렸을 경우는 참 안됐어요. 환자 스스로 뭐가 뭔지 아직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죠.”

그는 요즘 소설이나 영화를 많이 본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간접경험을 많이 쌓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유방암이 제게 준 교훈이라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을 한번 차근차근 뒤돌아보게 한 거죠.” 특히 무균실에서 누워 지내는 동안 의식마저 청정상태가 된 경험을 그는 잊지 못한다. 건강할 때 바쁜 일상에 묻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던 진실, 그리고 누구도 살펴보려 애쓰지 않던 삶의 핵심이 보석처럼 빛나게 보였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유방암을 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이 병을 앓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인생의 지혜를 깨달은 거죠.” 오진, 재발, 수술과 치료를 통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스스로 많이 성숙했다고 인정한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은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동안 너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데만 신경쓰고 살았다면, 병을 통해 영적이고 자연적인 삶에 대한 것, 거기서 오는 기쁨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할 수 있죠.” 그의 눈이 맑고 강하게 빛났다.

자가진단, 한달에 20분만 투자를

사진/ (류우종 기자)
그는 정기검진을 통한 초기 발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진국에서는 초기 발견율이 30%나 돼요. 조기검진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5% 정도밖에 안 돼요. 유방암도 시기를 지나면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10월은 유방암 의식향상 캠페인의 달이다. 각 매스컴에서도 어느 정도 얘기를 한 것 같다. 지금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 가보면 분홍색 리본으로 된 배지를 나눠 받을 수 있다. 여성들이 자가검진할 수 있는 안내 리플릿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유방암 검진 나중에 하지 뭐’ 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유방암은 40대 이후 여성들에게서 주로 발견됐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젊은 층 여성들의 유방암 발생률이 높아졌다는 뉴스가 있었다. 현재 암 환자의 전체 비율 가운데 위암 환자의 수가 가장 많다. 그러나 유방암 환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니 얼마 가지 않아 이 판도가 뒤바뀔 것 같다는 게 의료계의 전망이다. “한달에 한번 20분씩 투자해서 자신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없다면 병원에 가서 유방암 검진을 받아보면 된다.

유방암 센터 복도에는 환자를 따라온 보호자인 남성들이 몇몇 보였다. 그들은 진찰이나 치료를 받으러 간 아내를 기다리는 듯했다. 남성들은 아직 유방암에 낯선 무덤덤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요, 남자들도 유방암에 걸려요. 확률은 아주 낮지만요.”

아직 유방암 검진에 대한 국가 보조는 없다. 생리대 가격인하 문제도 아직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국가 모성건강 보호차원에서 보면 유방암 정기검진은 말로만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지원이 따라야 할 문제다.

유방암은 아무 통증 없이 몸 속에서 자란다. 소리 소문 없이 자라다 어느 날 문득 존재를 드러낸다. 인간의 육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마치 영원히 건강하게 살 것처럼 지내지만 아무 예고 없이 병의 공격을 받고 휘청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나약함을 극복할 만큼 강한 존재기도 하다. 김외련씨는 암 병동에서 그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나오며 나는 그와 어깨를 부딪쳤다. 그의 자그마한 어깨가 말할 수 없이 따스하고 힘있게 느껴졌다. 동지로서의 여성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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