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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골 산사의 작은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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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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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요 며칠새 나락 꼬실리는 연기와 구수한 냄새가 하늘을 뒤덮는다. 간간이 내리는 가을비로 기운도 내려갔을뿐더러 가을볕 놓치면 까딱 잘못하다간 보리 파종도 못하고 말 처지라 베어낸 나락 태우는 손길이 분주하다. 너른 들판을 가진 동네는 한해 농사 갈무리하고 한겨울 땅심 돋우는 보리농사 준비가 한창이다.

추운기 든 코스모스는 몸을 웅크린 채고 갈대의 몸사위는 깊어만 간다.

‘피곤한 날개 쉬어가라고’를 주제로 열린 사찰요리전과 산사음악회를 찾아가는 군남 용암리 길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벌써 몇해 전이던가 내 집처럼 드나들던 용암리의 맨 끝자락 하고도 오솔길을 한참을 올라가면 하늘과 맞닿을 듯 새초롬이 작은 절 한채가 서 있다. 바로 연흥사다. 특히 여스님만 6분이 살고 계신다는 사실에 자매애가 발동했고 수녀님들까지 동행한 음악회는 출발부터 들떠 있다.

하위문화에만 익숙했던 시골 아줌마들 행사 시작 두어 시간 전부터 절에 도착해 전시되어 있는 사찰 요리를 눈요기하고 가을 산사의 향취에 흠뻑 취한 눈치다. 원불교 여자교무님(정녀)이 바쁜 일로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여스님, 수녀님, 정녀님의 자매애가 잔뜩 기대되었던 터라….

하늘과 맞닿은 대웅전을 바람벽 삼아 전국에서 내달려온 스님들·보살님들, 대중맞이에 정성을 다하고 사방에 전시된 사찰 요리를 뒤로 한 채 가족·친구·마을사람들과 한자리 차지하고 둥굴레차로 한기를 달래는 모습이 세상일 놓은 사람들처럼 마냥 정겹다.

양계장 계분 치우다가, 파프리카 순 집다가, 나락 말리다가 빠져나온 아줌마들 양념과 조미료 없는 담백하고 어여쁜 자태를 뽐내는 사찰 음식에 배불리고 장작개비 타오르는 온기 찾아 산사에 울려퍼진 음악회에 오감을 열어젖힌다.


주지스님의 말씀마따나 “모든 것 놓아버리고 쉬어가라”고 마련한 자리에 젊고 늙고 여자고 남자고가 없는 것 같다. 느티나무를 연등이 휘감아 조명발 세우고 백열등에 소쿠리 씌워 내려준 소박한 불빛 아래 승무 춤사위가 흐드러지더니 판소리가 흥을 돋우고, 가야금에, 포크송이 연이어 터진다.

오월의 노래, 광주출정가를 만들었던 법능스님이 들려주는 노랫소리에 시린 가슴, 얕은 탄성이 터져나온다.

일 속에서, 일상에서 온전히 ‘나’로 돌아간 여성들의 얼굴엔 오만 가지 표정이 피어난다.

“오메 죽겠는거, 다 들어야 한디, 얼릉 가서 신랑하고 애기들 밥 차려줘야 한당게”라는 영란씨의 말에 깨어 속세로 내려갈 채비들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뗀다.

저녁엔 성당에서 열리는 ‘민족평화학교’에 참석해야 한다며 수녀님들도 갈 길을 재촉한다.

‘주한미군과 통일’을 주제로 강연해주실 문정현 신부님의 교육시간에 빠듯이 맞춰 산사를 빠져나오며 깊은 가을밤을 아무에게라도 퍼주고 싶은 맘 간절하다.

잠시라도 고단한 날개들 접고 쉬어가라고….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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