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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을에 찾아오는 '젊은 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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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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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바람 불면 갯벌로 올라오는 '꽃낙지'… 목포낙지집에서 여름내 지친 몸을 달래보자.

1960년대말 당구 이외에는 시내에서 특별히 시간을 '죽일' 거리가 없던 시절. 나는 가끔 친구들과 함께 무교동의 스타다스트호텔 골목 뒤쪽에 있는 음악감상질 세시봉에 들락거렸다. 특별히 음악을 잘 알거나 감상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교 때부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을 감상하러 오는 여대생들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사진/ 목포낙지집은 무교동식 낙지볶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싱싱한 낙지에 갖은 양념과 미나리·콩나물 등 채소를 넣어 자글자글 끓이는 전골을 낸다.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세시봉을 나와 당시 광화문에서 종각까지 가는 길의 무교동쪽에 즐비한 낙지집에 들어간다. 주머니 사정을 가늠해 낙지볶음 한 접시를 시켜 아껴 아껴가며 막걸리 몇 주전자를 비우지만, 고추장 국물 안에서 헤엄치던 낙지발들은 금세 사라지고 막걸리 한잔에 빈 젓가락만 고추장 국물을 휘젓는다. 그때 낙지집들에는 농촌에서 올라와 버스 차장으로 풀리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 15살 전후의 여자 아이들이 심부름을 했는데, 이들에게 50원을 쥐어주며 주방에서 고추장 국물 좀 얻어오라고 하면 낙지 건더기가 제법 뻑뻑한 국물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국물에 공기밥을 비벼 막걸리에 한 숟가락씩 뜨면 이것이 밥안주인데, 우리들은 이솝 우화의 신포도처럼 막걸리에는 밥안주가 최고라고 떠들어댔다.

이처럼 낙지에 대한 나의 '첫 경험'은 부족함과 아쉬움이었다. 이후 20여년이 흐른 뒤 나는 낙지를 만끽할 수 있는 집을 단골로 두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사직동 배화여대 입구에 있는 목포낙지집(02-739-5108)이 그 집인데, 여주인 유영숙(40)씨는 친정어머니로부터 낙지요리법을 전수받았다. 이 집은 냉동낙지를 매운 고추장 양념으로 볶아내는 무교동식 낙지볶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싱싱한 낙지에 갖은 양념과 미나리·콩나물 등 채소를 넣어 자글자글 끓이는 전골을 낸다.

전남 고흥군 녹동 유씨의 고향마을에서 나오는 낙지를 날마다 새벽에 직접 가져오기 때문에 싱싱한 것은 물론이고 값이 무척 싸다. 유씨는 "전골은 대·중·소 각각 5만, 3만, 2만원으로 일정하지만, 낙지가 많이 잡혀 값이 쌀 떄는 낙지를 듬뿍 얹어주기 때문에 노량진 수산시장보다 싸다"고 말한다. 30년 술꾼 인생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이는 사실이다. 사직동 목포낙지집 외에 홍제동 목포낙지(어머니 오순옥, 02-391-7992), 불광동 목포낙지(둘째딸 유경숙, 02-388-3551), 공덕동 목포낙지(셋째딸 유정숙, 02-713-7604) 등 네 모녀가 따로따로 낙지집을 열고 있는데, 같은 재료, 같은 메뉴, 같은 솜씨로 맛도 비슷비슷하다.

낙지는 초봄에 산란한다. 겨울이 지나면 갯벌 속에 구멍을 뚫고 암수 낙지가 들어가 산란해 수정한다. 수정이 끝나면 수낙지는 필사적으로 구멍을 빠져나오려 하지만 곧 암낙지에게 잡혀 먹히고 만다. 암낙지는 수낙지를 잡아먹고 기운을 차리지만, 그또한 새끼들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친다. 알에서 깬 새끼들은 이곳에서 여름까지 어미의 몸을 뜯어먹고 자란다. 낙지는 몸통·머리·팔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낙지 대가리라는 것은 장기가 들어 있는 몸통이고, 머리는 몸통과 팔 사이에 있어 쉽게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80년대에 어느 '장군님'을 생각하며 낙지 머리를 질겅질겅 씹은 분들은 실은 낙지 몸통을 씹은 것이다.


"봄 조개, 가을 낙지"라는 속담이 있다. "제때가 되어야 제 구실을 한다."는 뜻풀이처럼, 봄에는 조개가 겨울 내내 움츠러든 입맛을 나게 하고, 가을에는 여름철 무더위에 지친 몸을 추슬러 원기를 돋우는 데 낙지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리라. 가을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새끼낙지들이 갯벌로 올라오는데, 이 가을철 낙지를 꽃낙지라 해 최고로 친다. 꽃낙지가 겨울을 지내고 산란을 준비하는 봄철이 되면 묵은 낙지가 된다. 일이 매우 쉽다는 뜻으로 "묵은 낙지 꿰듯"이라는 속담이 있고, 일을 단번에 해치우지 않고 두고두고 조금씩 할 때 "묵은 낙지 캐듯"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묵은 낙지는 생의 마감을 앞둔 춥고 배고프고 굼뜬 낡은 낙지다.

실학자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살이 희고 맛은 달콤하며, 회와 국 또는 포를 만들기에 좋다. 낙지를 먹으면 사람의 원기를 돕는다"고 한 낙지! 늙은 낙지는 가고 젊은 낙지가 돌아온 가을, 30여년 전 낙지발 하나를 놓고 젓가락을 다투던 벗들이 생각난다.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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