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 발전에 기대지 않는 정치적 생태주의… 지속 가능한 경제 혁명 내세워 좌파 신념에 도전
<녹색 희망>의 부제는 자못 선정적이다. ‘아직도 생태주의자가 되길 주저하는 좌파 친구들에게’다. 지은이 알랭 리피에츠는 아글리에타, 부아예 등과 함께 조절이론 학파를 형성했고, 지금은 프랑스 녹색당의 경제정책 이론가며, 1999년부터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맡고 있다.
성장 위주의 신좌파 논리도 경계
그는 적색을 거쳐 녹색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로마시대의 스파르타쿠스 노예봉기부터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과 쿠바 혁명 등 수많은 세대가 면면히 이어온 ‘희망’을 믿은 적이 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면서도, “지난 세기에 이상적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던 사회, 즉 개인의 자유의지로 결합된 공동체에 살면서 노동분업에서 해방되어 오전엔 어부로, 오후엔 장인으로, 저녁엔 문학평론에 전념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 대한 꿈을 계속해서 꿀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걸 변절자의 가증스런 수사학이라고 외면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좌파 친구’들을 겨냥해 자신이 어째서 적색 패러다임을 버렸는지, 왜 노동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생태주의만이 희망인지를 경제적 이론틀을 가지고 설득하려 드는데, 그의 논리에 동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출발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펼치며 비교하는 방식이다. 그는 브라질의 룰라 노동자당이나 치코 멘데스(아마존의 생태계와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원주민 투쟁을 이끌던 환경운동가로 1988년 12월에 암살됐다) 같은 대안 세력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콜라주’의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각 사회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또 지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가이아 이론은 초월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 같아도 전쟁과 자기 파괴를 생명의 거대한 흐름이 자정 작용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낳는다고 본다. 실패가 명백한 현실사회주의나 아직 유효성이 있어보이는 사회민주주의에는 더욱 비판적이다. 스탈린주의적 판본은 가장 야만적인 생산지상주의이며 사회민주주의적 판본은 대중 소비의 무제한적 성장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종류의 생산력 발전(인간의 자연 지배로 풀이되는)을 믿지 않으며, 생산력을 통한 진보가 또 다른 진보를 낳는다는 관념을 불신한다. 발달한 생산력을 사회화해서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물질적 보증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이 적정하게 흡수·전유·소화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근본적으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완성되지 않을 분자혁명 꿈꾼다"
유럽의 구좌파는 자본주의적 진보의 이상이나 다름없는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국가 개입이란 좌표를 놓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차라리 미셸 푸코와 펠릭스 가타리의 후예로서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분자혁명”을 꿈꾼다고 한다. 이는 수많은 오류를 범할 위험성을 갖지만, 적어도 하나의 거대한 오류에 빠져드는 위험성으로부터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이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기름 속에 갇힌 가마우지만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경제 혁명을 앞세운다. 대표적인 게 주 35시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실업문제의 해결, 환경세 도입을 골자로 한 세제 개혁 등이다. 이 책이 프랑스에서 1993년에, 영어판은 1995년에 출간됐으니 시간이 제법 흐른 셈인데, 프랑스에서는 이미 실효를 보기 시작한 정책들이다.
정치적 생태주의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애매한 노선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다. 그는 반식민주의, 군축, 민주주의, 반인종주의 등 전통적인 좌파적 가치들을 정치적 생태주의가 이어받았으며, 이를 포기하는 좌파를 거부한다고 밝힌다. 특히 개방성과 연대를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를 옹호한다고 강조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올리브 숲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몰아 빈민굴에 살도록 하는 데 반대한다.”
‘차이 없는 평등’이란 추상적 구호에 머무르고 말았다. 평등과 차이 둘 다 인정하면서 그 모순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은 개인이 자율성, 연대, 책임성을 체화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만약 일부 녹색주의자들이 프랑스 중부 농촌 지방의 마을을 맨해튼 도심보다 더 좋아한다면, 그건 그들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나는 생태주의자이긴 하지만, 맨해튼·상파울로와 같은 대도시 심장부를 더 좋아하며 레 알(파리의 유명한 거리)이 없어진다면 크게 상심할 것이다.”
정치적 생태주의의 두 가지 함정
지은이는 사회심리분석가 친구의 말을 빌려 정치적 생태주의가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함정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체제는 항상 우리와는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우리들을 행동하도록 만든 빛나는 이상과 비교하여 정치적 행위의 결과가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상처받은 나르시시즘’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그러나 우리는 수십억이다…. 정치적 생태주의, 이는 이성의 겸손이며 의지의 포부이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사진/ 녹색희망. 알랭 리피에츠 지음, 박지현·허남혁 옮김. 이후 펴냄, 1만2천원.
출발은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펼치며 비교하는 방식이다. 그는 브라질의 룰라 노동자당이나 치코 멘데스(아마존의 생태계와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원주민 투쟁을 이끌던 환경운동가로 1988년 12월에 암살됐다) 같은 대안 세력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콜라주’의 한계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각 사회운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또 지구를 살아 있는 존재로 보는 가이아 이론은 초월적인 가치를 말하는 것 같아도 전쟁과 자기 파괴를 생명의 거대한 흐름이 자정 작용을 벌이는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낳는다고 본다. 실패가 명백한 현실사회주의나 아직 유효성이 있어보이는 사회민주주의에는 더욱 비판적이다. 스탈린주의적 판본은 가장 야만적인 생산지상주의이며 사회민주주의적 판본은 대중 소비의 무제한적 성장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종류의 생산력 발전(인간의 자연 지배로 풀이되는)을 믿지 않으며, 생산력을 통한 진보가 또 다른 진보를 낳는다는 관념을 불신한다. 발달한 생산력을 사회화해서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물질적 보증도 하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이 적정하게 흡수·전유·소화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근본적으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완성되지 않을 분자혁명 꿈꾼다"

사진/ 지난 9월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왼쪽)와 녹색당의 피셔 외무장관이 적-녹 연정을 다짐하고 있다. (SYGMA)

사진/ 프랑스 노동당의 경제정책 이론가로 활동하는 알랭 리피에츠. 그는 정치적 생태주의가 새로운 대안임을 역설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