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독자의 마음에 꽂혀봐!

431
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책표지

책의 영혼까지 바꾸는 출판의 마지막 작업… 생명력 지녀 예술로 승화된 작품도 등장

사진/ 첫번째·두 번째 소설 <롤리타>의 1971년판과 2000년 판본, 세 번째는 1930년대 전후의 책표지, 나머지는 1960년대 미국 스릴러 소설들(사진 맨 왼쪽부터)
모든 것들은 다 제 얼굴을 가진다. 생명이 없는 책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책의 경우에는 몸이 우선 만들어지고 얼굴은 맨 나중에 만들어진다. 번역했거나 저술한 원고가 출판사에 도착하면 편집부에서는 원고를 다듬고 편집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책의 몸을 만드는 일이다. 슬슬 이 일이 거의 되어갈 즈음이면 책의 얼굴을 만드는 책표지 작업에 들어간다.

이런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기획이나, 이렇게 만들자는 편집의 과정은 의외로 별 논란이 없이 끝난다. 논의를 이끄는 기획자나 편집자가 의견을 제시하면 다른 이들이 다소의 이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냥 넘어간다. 그렇지만 책이 나오긴 직전, 책이 제 얼굴을 가지게 되는 책표지의 선정을 둘러싼 편집회의는 살풍경이다. 평소 조용하게 직원들이 하는 일이나 지켜보면서 말을 아끼던 사장님도 ‘이런 게 어떨까’ 하고 참견하고, 책이 나오면 누구보다 바빠질 영업담당자는 ‘요즘엔 이런 것이 서점에서 유행’이라며 언성을 높인다.

책의 얼굴에 정성을 쏟는 까닭


사진/ 최근에 출판된 책표지 중에 예술적으로 뛰어나거나 잘됐다고 평가받는 외국서적들.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 때 가장 공들이고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 책표지 선정 및 제작 과정이다. 영어로는 ‘북 재킷’ 또는 ‘프런트 커버’라고 하는 책표지는, 보통 ‘북 디자이너’라고 해서 프리랜서나 조그만 회사를 차리고 출판사의 외주를 받는 디자이너들이 제작을 맡는다. 물론 전체적인 분위기나 최종 결정은 출판사의 몫이고, 규모가 있는 출판사의 경우에는 디자이너를 고용하여 내부 디자인으로 책표지를 꾸민다. 책표지 하나에, 디자이너의 경력이나 솜씨에 따라 받는 가격이 천차만별이어서 70만원에서 200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집집마다 한권씩 있을 족보에서 보듯 예전의 책표지는 단순했다. 표지에 책제목이 덩그러니 하나 쓰여 있을 뿐이었다. 유럽이나 아랍에서는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하고 금박을 씌운 수제본도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책표지는 20세기 들어 인구의 증가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출판물이 대중화되면서 나타났다. 그렇지만 초창기 책표지는 책제목과 단순한 일러스트의 결합에 불과했다.

1950년대 이후부터 책표지도 영화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선정적인 것들이 나타났다. 이는 ‘007 시리즈’를 비롯한 추리탐정과 공상과학, 공포물 등 대중소설 분야에서 요즘의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밀리언셀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단번에 독자의 눈을 뺏어 책을 사게 만들 위해서는 책표지도 변해야 했다.

또한 베스트셀러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지는 유행이 생겨나자 영화의 이미지가 거꾸로 책표지가 되는 사례도 생겼다. 그 중 미성년자에 대한 어느 중년 남자의 욕망과 사랑을 다루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러시아 태생 미국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1962년에 거장 스탠리 큐브릭, 그리고 1997년 <나인 하프 위크>의 감독 에이드리언 라인에 의해 각각 영화로 만들어졌다. 두 영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책표지로 만든 원작 <롤리타>의 1971년판과 2000년판 펭귄 문고는 두 영화의 성격과 차이점을 엿보게 하여 흥미롭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몇년 전까지 <롤리타> 펭귄 문고의 표지를 장식한 것은 작고한 화가 발튀스의 그림이었다. 발튀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였고, 그의 미소녀 취향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묘한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원작만큼이나 좋아서 그 영화의 포스터를 그대로 따른 71년판 책표지에 대한 나의 애정은 깊었고, 나보코프의 소설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발튀스 그림의 책표지도 내 20대 후반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연인이었다. 그러나 신판 <롤리타> 책표지, 10대 소녀의 도발적인 사진을 접할 때마다 정신적 원조교제를 하는 느낌이다. 책표지는 책의 영혼까지 바꾸어놓는다.

책은 끝까지 읽어봐야 좋다 나쁘다는 내용을 알게 마련이어서, 독자들은 책을 고를 때 책의 첫인상인 책표지에 따라 구매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책표지를 통하여 한눈에 이 책은 이러저러한 내용이란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별 볼 것 없는 내용에 책표지만 화려한, 과대 포장하고 인공 성형한 책이 늘어났다. 막상 책표지만 보고 판단하여 구입한 뒤 괜히 샀다고 후회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의 책표지는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지적이 많다. 외국의 어느 북 디자이너는 “백화점 선물코너의 포장지 같다”고 비꼬았다고 한다. 게다가 책표지에 과다한 비용이 들어가, 이것이 책값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책값 인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실한 내용도 화려한 포장으로 만회

그렇지만 책표지에 대한 과잉된 관심은 그냥 책의 표지로만 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 할 만한 것까지 나오게 했다. 북 디자이너들도 출판사의 일방적인 제작지침을 따르던 관례에서 벗어나 낼 책의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거나, 이렇게 하자고 스스로 결정 내려 출판사에 통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책표지가 만들어질 때쯤이면 디자이너와 출판사는 서로간의 자존심을 건 치열한 입씨름을 벌이며, 출판사 내부에서도 몇개의 시안을 놓고 격론을 거듭한다. 이러한 갖은 산고 끝에 책은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가지게 되고, 서점 또는 인터넷에서 독자와의 맞선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참고자료: Alan Powers, FRONT COVER, Mitchell Beazley 2001)

도상학연구가 alhaji@hanmail.net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