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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영혼의 사랑을 누가 막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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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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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를 모티브로 삼은 일본의 <비밀>과 한국의 <중독>… 낯선 육신을 껴앉는 파격적 사랑의 차이

사진/ 일본영화 <비밀>은 치명적인 사랑의 집착을 발랄하게 집어던진다.
2000년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에서 조용히, 그러나 충격적으로 상영됐던 영화가 있다. 일본 미이케 다카시의 <비지터 Q>. 막가는 집안의 이야기를 시치미 뚝 떼고 능청스럽게 해나가는데 연신 뒤통수를 때리는 듯했다. 영화는 딸과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원조교제를 취재하던 아버지가 집나간 고등학생 딸과 마주친다. 원조교제로 생활해가는 딸을 훈계하거나 설득하기는커녕 비디오 카메라를 들이대며 남 대하듯 하더니 급기야 ‘원조교제’ 상황이 벌어진다. 근친상간이 벌어진 뒤 딸에게 “모자란 돈은 엄마에게 받아”라고 말하는 아버지나, 모자란 화대를 받아든 딸이나 그 표정이 태평스럽기까지 하다. 이어지는 어머니, 아들의 이야기도 만만치 않게 엽기적인데 어느 순간부터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영혼과 육신을 대하는 두 개의 시선

최근 개봉해 흥행에 호조를 보이고 있는 일본영화 <비밀>의 모티브도 당혹스런 여지가 있으나, <비지터 Q>의 공격적인 전복 이미지와는 반대되는 예쁜 순정만화식 전술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거부감을 예방했다. <비밀>에서는 빙의를 ‘빌미’ 삼아 부녀지간을 졸지에 부부지간으로 바꿔놓는다. 남의 영혼이 누군가의 몸에 들어간다는 빙의를 모티브로 삼은 한국영화 <중독>도 10월2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여기선 형의 영혼이 동생의 몸으로 들어가 형수와 시동생이 부부지간이 돼버린다. 흥미로운 건 영혼과 육신을 대하는 두 영화의 차이, 좀 과장스레 말하면 한·일의 시선 차이가 뚜렷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흔히 완벽한 사랑은 영혼과 육신의 온전한 결합에 있다고 하지만, 이들 영화에선 연인들이 아주 중대한 선택의 기로를 맞는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 낯선, 더구나 금기시된 육신으로 옮아갔으니 그 몸까지 사랑할 것이냐, 말 것이냐.


<비밀>(원작 히가시노 게이고, 감독 다키타 요지로)에서 엄마 나오코와 딸 모나미(히로스에 료코)가 외가에 제사를 지내러 가다가 큰 사고를 당한다. 졸음운전 때문에 버스가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모녀는 병원 침상에서 나란히 사경을 헤맨다. 남편 헤이스케(고바야시 가오루)가 도착했을 즈음 아내 나오코가 숨지며 그의 영혼이 딸 모나미의 육신으로 옮겨간다. 눈을 뜬 딸 모나미를 반갑게 바라보는 헤이스케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게 된다. “여보, 나 모나미가 아니라 나오코야!”

당혹스러워하던 헤이스케는 둘만이 간직해온 사랑의 추억을 확인하면서 딸의 몸을 지배하는 혼이 아내라는 걸 현실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타인들에게 이를 설명해낼 도리가 없다. 집 안에서는 부부로, 집 밖에서는 부녀로 지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이어진다. 집 안에서 이들이 나누는 대화나 태도는 예전의 부부 사이로 쉽게 돌아갔지만, 난처해진 건 몸이다. 40대에서 10대로, 그것도 딸의 몸을 빌려 살아가는 아내와 동침할 수 있을까 한방에서 나란히 잠을 청하지만 관계맺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아내가 먼저 과감히 요구하지만 헤이스케는 망설이다가 포기하기를 되풀이한다.

딸의 몸으로 들어간 아내의 영혼

이들의 사랑에 문제가 생기는 건 그 사이 아내가 대학생으로 커버렸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청춘이 다시 찾아온 셈이다. 혼돈이 시작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나미를 멋진 남자 대학생이 쫓아다니기 시작하고 모나미는 애써 그를 멀리하지만 늙은 남편() 헤이스케는 자꾸 초조해진다. 사고 뒤, 헤이스케는 모나미의 젊은 담임 선생에게 끌리기도 했지만 ‘정절’을 지킨다. 그래서 그도 아내에게 너도 육신이 아닌 마음의 사랑을 지키라고 단단히 요구한다. 둘 사이의 긴장감이 위기에 이르렀을 때, 헤이스케는 다시 한번 모나미와 동침을 시도한다. 그러나 모나미의 몸이 딸의 것이라는 건 너무나 명쾌하다.

이제 아내 나오코는 선택해야 한다. 몸이 결핍된 사랑의 관계를 지속할 것이냐, 몸이 요구하는 새 생활을 시작할 것이냐. <비밀>의 진짜 비밀은 여기서 시작된다.

가벼운 듯 코믹스럽게 전개되는 <비밀>에 비하면, <중독>(감독 박영훈)은 한없이 무겁고 진지하다. 은수(이미연)와 호진(이얼) 부부, 호진의 동생 대진(이병헌)은 한집에서 다정스레 산다. 형제간, 형수와 시동생 간의 사이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고, 부부 사이의 애정은 너무나 각별해서 결혼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연애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다. 그런데 사고가 생긴다. 카레이서 대진이 경기에서 사고를 당하는 순간, 동생의 시합을 보러 가던 호진도 교통사고를 당한다. 몸은 살아 있으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던 둘 사이에 먼저 깨어난 건 동생 대진이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벗어난 건 좋은데 대진이 실은 호진이라고 주장한다. 요리하는 솜씨나 가구 조각을 하는 손놀림도 호진에 가깝지만 은수는 빙의를 믿지 않는다. 과거의 비밀스런 기억들을 공유하고서야 은수는 시동생을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비밀>과의 차이는 영화의 호흡이나 연기 방식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은수가 대진을 호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화는 둘 사이의 섹스장면을 고전적인 연출방식으로 지루하다 싶을 만큼 길게 보여준다.

이건 놀라운 일이다. 금기시된 몸의 경계를 뛰어넘었으니 <비밀>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해야 할까. 영혼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낯선 몸까지 순식간에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독>에서 보여주는 사랑의 주인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다. 몸은 영혼의 부속물일 따름이다. <비밀>에선 몸과 영혼이 독립된 존재다. 아니, 몸의 ‘인격’을 존중할 뿐 아니라 그 몸의 인격이 영혼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점에서 <중독>과는 정반대다. 두 작품 모두 빙의라는 모티브로 시작했고 또 중대한 반전을 만들어놨다. 그 반전들도 이런 ‘시선의 흐름’을 뒤집지는 않는다. <중독>이 “미치도록 그리웠고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이어가고, <비밀>은 그 집착을 발랄하게 집어던진다.

거침없는 사랑은 어디까지 갈 건가

사진/ 한국영화 <중독>은 영혼의 사랑을 한없이 무겁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중독>의 사랑이 파격적인 건 틀림없다. 이재용 감독의 <정사>에서 한 가정의 아내(이미숙)가 시댁 제삿날에 동생의 약혼자(이정재)와 사랑을 나누던 과감함에 비하면, 형수와 시동생의 거침없는 사랑을 다루며 ‘한 발짝’ 더 나아갔으니 말이다. 아마도 한국 멜로가 벗어낼 마지막 짐은 집착 혹은 질식할 것 같은 무거움의 틀이 아닐까.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그랬지만, ‘솔 메이트’(영혼의 짝)를 숭상하는 전통을 비껴가지 않고는 마지막 점프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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