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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스팔트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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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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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콤바인이 논으로 들어서면 가을 들판은 쉼없이 돌아간다. 태풍 루사도 버팅겨낸 노란 들판이 하루가 다르게 누런 빛으로 변해가고, 농촌의 인심도 덩달아 바빠진다. 농민들 바쁜 맘 아랑곳하지 않고 꼬릿한 내를 풍기며 노란 은행이 마당 그득히 떨어져 있고, 낙엽을 떨궈버린 감나무는 홍시감을 내어놓을 양으로 온 동네를 불긋 물들인다. 이제 막 나락을 베어낸 들판의 상긋한 나락 속살 냄새는 연방 코를 벌름거리게 하고 다람쥐보다 청솔모의 먹잇감이 돼버린 도토리며 밤은 빈집만 남겨놓은 채 낙엽속을 채운다.

‘아! 가을인가’ 싶더니 높아만 가는 하늘 덕에 청산댁네 나락이 첫 번째로 마을회관 앞을 점령한다. 가을볕에 한 이틀 먼지 뒤집어쓰며 몇 차례 뒤집기를 되풀이하더니 꼬득꼬득 잘 말려져 청산댁네 곳간을 채운다.

봄에 땡겨 쓴 영농자금 갚으려니 왠지 공돈 없어지는 것 같아 가슴이 허심허심(허전)하다가도 내년 영농자금 수월허니 받으려고 나락 젓는 손이 분주해진다. 한만이엄마 손길, 발길 익은 담배밭에는 벌써 무시(무)잎이 나풀거리며 한여름의 푸르름을 대신하고 거두지 못한 고춧대가 말라붙은 밭두렁에는 수명을 다한 콩잎이 누렇게 고개 숙인다. 검은콩이며 진주리콩(메주콩)을 거두고 손질하는 가겟집 아줌마는 “올해는 한되빡에 얼마 할끄나” 하며 속셈을 놓아 본다.

제집 마당이나 비닐하우스를 넘어선 나락들은 도로가를 점령하기 시작하고 좁아진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조심운전을 하다가도 터는 수고로움을 덜려고 도로 한가운데 내어 널린 조, 수수를 만나면 반가이 가을일에 동참한다.

농촌의 가을일은 고되다. 생나락을 나르는 일이며 말린 나락 다시 포대에 넣어 곳간에 쟁이고 나면 다시 수매 나갈 나락 근중(무게) 떠서 꿰매고 소작료 실어다 줘야 하고…. 온 식구 다 달라붙어 손밀차, 고무 다라이 총출동한 가을일에 8살쟁이 성호도 나서 “끙” 소리라도 보태야 한다. 그나마 가까이 사는 자식들이 휴일을 이용해 일손을 거들기도 하지만 노인들만 사는 집들이 대부분이라 나이의 적고 많음이 노동의 경중을 가르지 못한다. 죽을 둥 살 둥 일하고 저녁마다 앓는 소리로 고단함을 이겨낼 뿐….

쌀개방으로 쌀값이 떨어진 몇해 전부터 가을 들녘은 풍요로움을 잃어버렸다. 쭉정이만 남은 것마냥 빚갈이 하고 나면 다신 빈손이다. 이자라도 순환되면 올 농사 괜찮은 편이고 그마저 어려우면 겨우내 부채상환 독촉에 시달려야 한다.

올봄 이미 농민들은 논에 모를 꽂으며 겨울의 아스팔트 농사를 준비했다. 지난 여름부터 100일간 전국을 걸으며 농업 회생을 염원한 100명의 농민들이 10월13일 긴 행군을 마치고 서울에서 ‘우리쌀 지키기 만민공동회’를 연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11월13일 여의도에서는 ‘쌀개방 반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가 열린단다. 겨울만 되면 되풀이되는 아스팔트 농사 덕()에 농민들은 겨울날의 달콤한 휴식을 포기한 지 오래다.


“요즘 농촌이 심상치 않당께! 다들 오래 살 것 맨치로 집들 크게 지어놓고 술렁술렁 혀! 우리도 후회시럽구만.” 파프리카 농사꾼인 영란씨 말이 뒤통수를 친다.

쌀개방에 맞선 대결전을 앞둔 듯 가을 들녘엔 콤바인 소리가 높아만 간다.

이태옥 ㅣ 영광 여성의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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