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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단일팀 품고 ‘남북 허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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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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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시아드에서 무르익은 화해 분위기… 체육교류 정례화 합의로 단일팀 예고

사진/ 부산아시아경기대회는 남북 체육교류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북쪽 선수들을 응원하는 한겨레남북공동응원단. (박승화 기자)
남과 북이 소리 높여 ‘조국’과 ‘통일’을 외칠 때 분단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산아시아경기대회의 마스코트 노릇을 톡톡히 한 북쪽 응원단과 남쪽 공동응원단이 그 중심에 있었다. 지난 10월13일 북쪽 응원단은 오로지 남쪽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남자축구 3,4위전이 열린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을 찾았다. 그들에게 남쪽 선수는 ‘우리 선수’일 뿐이었다. 북쪽의 여자 마라토너 함봉실 선수가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등장했을 때 남북은 한목소리로 환호를 보냈다. 남과 북의 하나된 응원의 현장은 감동의 물결을 이루었다. 하나된 조국를 기원하는 것은 비단 응원단만의 바람이 아니었다. 지난 10월3일 남북 소프트볼 경기를 마친 뒤 북쪽 소프트볼팀 박영복 책임감독은 “남쪽 응원단이 경기력을 높이는 데 힘이 됐다. 오늘은 남북이 맞섰지만 머지않아 한팀으로 국제대회에 참가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은 맞서도 내일은 한팀으로

사진/ 남쪽 축구 선수들이 3위에 오른 뒤 북쪽 응원단을 찾아 인사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부산아시아경기대회가 남북 화해의 기대감에 뚜렷한 진전을 예고하고 있다. 북쪽 선수단은 사상 처음으로 남한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해 상징적인 의미도 남달랐다. 남북 선수들은 합동훈련을 벌이기도 하고, 경기장에서 접전을 펼치면서도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흐뭇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북쪽의 유도 영웅 계순희 선수가 뜻밖의 판정패를 당했을 때 함께 성화 최종주자를 맡았던 하형주씨는 계 선수를 찾아 위로했다. 북쪽 유도팀의 김경수 감독은 “심판들이 전날에는 남조선 선수 두명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마저 죽인다”며 남북을 감싸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세계 최강 중국을 꺾은 여자 탁구, 여자 축구 등 북쪽의 승리 현장에는 어김없이 공동응원단이 승리의 한 주역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번에 남북한이 부산에서 얻은 가시적 성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적어도 북한의 참가 자체만으로도 한반도의 화해 무드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게다가 360여명의 북쪽 응원단은 ‘화해 사절단’으로 의미 있는 구실을 했다. 그들은 빼곡한 일정에도 경기장 밖에서 부산 대회를 극적인 분위기로 바꾸었다. 북쪽은 전격적인 제안을 통해 지난 8일 응원단과 취주악단이 벡스코(BEXCO) 주차장에서 거리공연을 처음으로 벌인 것을 비롯해 5차례에 걸쳐 공연을 가졌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산 시민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심지어 남한에서 경기를 하는 북쪽 선수들을 보기 위해 미국에서 날아온 사람도 있었다. 뉴욕에 거주하는 김주원씨는 “북쪽의 참가 소식을 듣고 가슴이 벅찼다. 남북이 서로 껴앉는 모습을 직접 보려고 서둘러 부산에 왔다”고 벅찬 감회를 말했다.

앞으로 남북관계에 획기적 진전을 예고하는 성과도 적지 않다. 그동안 통일축구나 통일농구 등 종목별 체육교류가 시나브로 이뤄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남북 체육교류가 양쪽 국가올림픽위원회로 창구를 일원화하면서 정기적인 남북 스포츠 행사를 벌여갈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8일 이연택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과 북한의 박명철 조선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오찬 회동을 통해 이른 시일 내에 남북 스포츠 협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되면 전국체전 등의 국내 행사 상호참관, 청소년 체육교류 등 경기력 향상을 위한 협력이 일상화되고 서울~평양 간 역전 마라톤대회, 경평축구 등까지 폭넓은 교류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절반의 성공, 단일팀이 최후의 결실

사진/ "이제는 단일팀으로 국제대회에 나가고 싶다." 남과 북이 맞붙은 여자 축구경기. (한겨레 김봉규 기자)
체육교류는 복잡한 복선이나 이해득실이 갈린 정치 경제적 교류보다 유연하게 이뤄진다. 물론 정치적 신뢰회복이 전제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의 분위기는 정치적 장애마저 사라질 기미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 일본,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고 신의주 특별행정구 지정 등으로 남북관계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학래 민족통일체육연구원 이사장(한양대 교수)은 “이미 스포츠를 통한 남북화해는 이뤄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서로의 경기력을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 일체감 조성에 힘쓴다면 한반도 평화공존, 신뢰회복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스포츠를 통한 사회통합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예컨대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브라질을 통합하는 게 바로 축구이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럭비를 통해 흑백화합을, 중국은 축구를 통해 소수민족을 보듬고 있다.

이제 반세기에 걸친 반목을 씻고 정서적 통일에 바짝 다가선 게 사실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북 단일팀 구성이 성사되지 않은 때문이다. 남북한 체육교류를 위한 회담은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대회를 앞두고 1958년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그동안 남북 단일팀은 고작 두 차례 성사됐을 뿐이다. 지난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참가(여자 단체전 우승)했고, 같은 해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에 단일팀이 출전해 8강 진출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 뒤 단일팀 출전은 기대만큼 성사되지 못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4년 주기로 단일팀 참가를 촉구했지만 정치적 비방과 사과 요구 등 체육외적 변수로 인해 되풀이되는 결렬사태를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 부산 아시아경기대회는 남북 단일팀 구성에 관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시드니올림픽에 이은 동시입장을 이뤄냈으며 공동응원을 통해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남북 체육계 인사들이 자연스럽게 접촉하면서 체육교류 정례화에 뜻을 모았다. 물론 그것이 단일팀 구성으로 이어질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힘들다. 과거 동서독의 경우에도 10만여회에 걸친 체육교류를 통해 동질성 회복과 교류협력을 증진했다. 하지만 독일은 단일팀 성사에는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중앙대 안민석 교수(사회체육)는 크고 작은 체육교류 대중화 성과를 단일팀 구성으로 이어가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부산대회를 기점으로 체육교류가 확대될 게 틀림없다. 문제는 그것을 일회성 교류가 아닌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류로 이어갈 수 있느냐이다. 이젠 동서독이 하지 못했던 단일팀을 이뤄낼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이제는 국제사회에 하나의 조국을 보이자

2002년은 남북 체육교류사에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한·일 공동 월드컵은 한반도의 북쪽이 배제되면서 그 의미를 남북화해로 승화하는 데 실패했다. 이에 비해 부산아시아경기대회는 북쪽 선수단과 응원단의 참가로 한민족의 하나됨을 확인하고 아시아드를 감동의 축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의 시민사회단체는 비무장지대(DMZ)에 남북한 공동체육시설의 설치 방안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경의선이 연결되며 북쪽이 비무장지대 병력 감축안 등을 마련하는 상황에서 DMZ 체육시설과 단일팀 성사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동포 응원단으로 부산을 방문한 김성민씨는 11년 전 지바에서 단일팀을 응원했던 한반도기를 챙겨왔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부산에서 남북이 한팀을 이뤄 참가했다면 공동응원이 더욱 뿌듯했을 것이다. 국제대회에서 남북이 서로 맞붙어 경기하는 모습을 이제는 그만 보고 싶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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