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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음에 갇힌 ‘나’를 만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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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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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의 이론과 실천이 소설 기법으로 등장… 상처 보듬고 치유하는 일상 속의 문화 현상

일러스트레이션/ 방기황
직장과 가정에서 안주하도록 요구받는 나이. 청년시절 못 태운 정열과 상처에 휘둘리는 시기. 하지만 중년의 안정엔 이르지 못한 나이, 37살. 37살들의 방황과 길 찾기의 중요한 나침반으로 ‘정신분석’을 내세운 소설 두편이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고 뜨거운 사랑을 얻고 있다. 지난해 말 나온 김형경씨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문이당 펴냄)은 20만권이 팔렸고, 조선희씨의 <열정과 불안>(생각의나무)은 출간된 지 석달 남짓한 기간에 ‘3쇄 행진’에 돌입해 1만8천권을 찍었다.

두 소설 모두 건축가, 카피라이터, 벤처 기업가, 정신과 의사 등 겉으론 멀쩡해보이는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묻는다. “당신의 영혼은 탈이 없는가, 곤궁에 빠진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혹 해묵은 상처를 감추고만 있진 않은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주인공이 의사에게 심리치료를 받는 장면에선 전문적 심리용어들이 등장하며 자세하게 그렸는데, 독자들은 오히려 이런 점에 열광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난 뒤에도 “사흘 밤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서른넷의 한 독신 여성은 “주인공처럼 삼십여해 동안 살피지 못한 마음속 우물이 있다는 생각에 나도 상담을 받아볼까 고려했다”고 털어놨다.

이 소설들의 어떤 장치들이 독자들을 매혹하는 걸까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동원해 구구절절이 자신을 설명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독자들을 어떻게 끌어당기는 걸까 정신분석은 이 소설의 인기만큼 우리 곁에 일상으로 다가온 걸까. 심리이론 연구와 임상치료를 병행하는 홍준기씨의 분석과 함께 문학사에 나타난 정신분석의 사례들을 실었다. 편집자


정신분석을 한다는 것, 정신분석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과 나 자신의 하찮아 보이는 이야기와 끝없는 수다, 불평 속에서 우리의 전 존재의 무게와 고통, 사랑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사소한 잡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학문이라고 비아냥거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이란 그러한 일상성과 그 속에 담긴 깊은 시름과 환희 이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나는 길에서 xxxx라는 숫자가 써진 자동차를 만나고 싶어요”라는 말로,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의 상실을 표현하는 아이의 고통으로부터, 울먹이는 히스테리적 여성의 억제된 분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정신병이 악화된 망상증 환자의 불안와 불면에 이르기까지 분석가를 마주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사랑과 고통을 말하며 삶의 의미를 묻는다.

억압된 욕망과 성, 사랑에 대한 관심 반영

사진/ 프로이트의 글을 암시하는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과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가 돋보이는 조선희의 <열정과 불안>.
정신분석학이란 무엇인가 간략히 말하면, 그것은 각 개인의 ‘사랑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이 정신분석학에 매력을 느끼는 까닭은 이 대목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억압된 욕망과 성, 사랑에 대한 관심 고조는 현대 사회에서 각 개인의 자의식의 발달과 맥을 같이한다는 사실을 덧붙이면 이는 사족이 되고 말 것이다. 푸코라면 이쯤에서 ‘자기의 돌봄’을 말하려 할 것이다. 라캉은 히스테리는 ‘사랑의 역사’이며,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위대한 사상은 인정하기 힘든 ‘주체적 진리’와의 고통스러운 대면을 통해 출발하며 완성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특히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은 사랑·성·고통과 같은 주체적 진리에 대해 주목함으로써 생겨났다. 프로이트에게 ‘위대한 사상’과 ‘사랑의 역사’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은 한 개인의 역사는 고통스러운 사랑의 역사임을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 창립되고 발전된 것이었다. 라캉도 자신은 스무살이 된 이후로 사랑의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 철학자들을 탐구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2>은 국내에서 확대되는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매우 대담하며 특이한 소설이다.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폭발적 관심을 끈 까닭은 무엇보다 주인공 세진이 자신의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정신분석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다는 데 있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1, 2>은 비록 한없이 먼 길처럼 보이지만 자신으로 돌아감으로써만 자신과 세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정신분석의 근본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김형경은 이 소설을 통해 어쩌면 정신분석은 오늘날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 남은 마지막 희망일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마치 ‘강요하듯’ 우리에게 던진다. 그러나 이 강요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정신분석의 무용성에 대한 강요’가 너무 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진은 부모가 이혼했기 때문에 외할머니의 손에 맡겨져 성장했으며, 이 때문에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무의식적 환상과 분노로 고통받는다. 또한 세진은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애정을 기대하지만 아버지는 세진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세진을 사랑한다. 그녀가 도저히 들고 갈 수 없는 쌀가마를 건네주고 돌아서는 아버지. 세진은 이를 ‘쌀가마니 사건’이라 부른다. ‘쌀가마니’는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타자의 억압에 대한 은유기도 하다. 건축가로서, 커리어 우먼으로서 자리잡지만 세진은 해결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굴레에 여전히 갇혀 있다.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오이디푸스기, 퇴행과 파괴를 두려워하는 점, 성폭행에 의한 좌절,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 속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견지하는 수단”으로 세진은 성과 사랑의 불능을 “채택했다”. 김형경은 때로는 ‘전 오이디푸스기’에서의 애정의 결핍, 때로는 ‘오이디푸스기’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욕망의 좌절을 말하면서 ‘혼합주의적’ 설명방식을 택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프로이트적 오이디푸스 이론을 따라 세진(그리고 인혜)의 무의식을 분석한다. 정신분석을 통해 ‘거듭난’ 세진은 이제, 자신이 그토록 미워한 억압적인 어머니에게서 상처 입은 여성을 발견한다. 세진은 타히티의 해변가에 누운 동성애 남자들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건축가로서 그녀는 정신분석적 집을 설계하는, 라캉이 말하는 ‘증상의 창조적 활용’의 꿈을 꾸기도 한다. 세진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 힘들게 자신의 옆을 지켜준 경호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세진에게 경호는 말한다. “혹시 여행하다가 힘들거나 외로우면 그냥 울어요. 눈물만 흘릴 것이 아니라 어디든 편하게 퍼질러 앉아 크게 소리내어 울어요.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세요.” 세진은 생각한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 세진은 ‘분석의 끝’에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세진과 함께 가파른 분석의 과정을 지켜본 독자들 역시 사랑의 꿈을 품는다.

무의식의 나를 만나며 정신분석 이해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될 수 있는 문화현상이나 문학·예술 작품은 많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적 비평을 행하지만, 적어도 국내에서 정신분석 자체를 주제로 삼는 문학 작품은 지금까지 없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소설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중하다. 치료자와 피분석자의 입을 통해 김형경은 정신분석 임상과정 및 이론을 상세하게 묘사, 설명하며, 이와 더불어 주인공 세진의 심리적 변화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정신분석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단순한 호기심이나 이론적 관심보다는 ‘먹고 사느라고’ 방치된 자신의 영혼을 쓰다듬는 진지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치자.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라는, 프로이트의 글을 암시하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뿌리로부터 되묻는 이 소설을 읽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피분석자가 되고 분석가가 되며, 일상에 묻혀 감춰진 나의 무의식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조선희의 <열정과 불안 1. 2>, 특히 2권은 김형경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보다 상세하거나 치밀하지는 않지만, 역시 정신분석의 이론과 실천을 작품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며, 정신분석 치료과정과 이론에 대해 많은 쪽을 할애한다. 스스로 분석을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인 인호를 찾아온 민혁, 분석을 직접 요청하지는 않지만 철저한 자기분석을 통해 죄의식과 삶의 무의미와 싸우는 영준, 치료자면서도 피분석자와의 역전이에 휘말리는 ‘잘못’을 범하지만, 그 와중에서 자신의 신경증과 무의식에 대해 분석해 들어가는 인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방황하며 고통받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김형경의 작품이 좀더 정신분석적이고 실존적이라면, 조선희의 작품에는 사회적 관심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김형경의 글은 임상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기 때문에 좀더 이론적이고, 따라서 좀 지루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과 같은 ‘특별한’소설이 제공하는 장점이기도 하다. 반면 조선희의 글은 더 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를 갖췄지만, 정신과 의사인 인호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정신분석 이론과 실제에 대한 서술은 좀 미진해보인다.

문학의 지평 넓힌 심리적 투쟁의 기록

이렇게 정신분석을 소재로, 또는 주제로 다룬 소설들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읽히는 까닭은 무엇보다 정신분석의 본질이 ‘나’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신분석은 사회적 문제를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우선적으로’ 정치나 사회 같은 거창한 대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일상적 ‘주체’에 관한 이론이며 실천작업이다. 그리고 이런 ‘주체적’ 분석작업은 ‘무의식의 발견’을 경유해, 원하든 원치 않든 놀라운 ‘사회적’ 효과도 낳는다.

두 소설을 읽으며 필자는 기왕에 정신분석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소설이라면 이론적으로 좀더 치밀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아쉬움에도 두개의 정신분석적 소설을 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어차피 삶이란 건조한 이론이 아니라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 문제들과의 끝없는 ‘심리적 투쟁’의 기록이기에 말이다.

홍준기/ 홍준기정신분석연구소 소장 junkh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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