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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오래된 책장을 넘겨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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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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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점

깊은 배움을 선물하는 도쿄의 간다 고서점 거리… 사라지는 청계천 ‘책의 하천’도 복원하라

사진/ 이 사람이 고서 수집가다!
‘책의 계곡’.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 거리를 가리켜 나는 그렇게 표현하곤 한다. 도서관을 빼면 단위 면적당 세계에서 책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며, 파리 센 강변의 노천 고서행상이나 영국의 책마을 헤이 온 와이도 156개의 전문 고서점이 모인 이곳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구역 이름이 ‘간다’이며 전철역 진보초를 중심으로 넓고 깊은 ‘책의 계곡’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뭔가 좋은 책 또는 신기한 책을 찾으려는 순례자들로 늘 붐빈다.

열대여섯 사춘기 시절부터 간다 고서점 거리를 찾기 시작하여 육십을 바라본다는 어느 소설가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아직도 무슨 책과 또 만날까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메이지·쥬오·도쿄 대학 등이 근처에 있고, 여러 출판사의 본사까지 있는 이곳은 그야말로 일본 지성의 심장이다.

인생을 배우고 앎을 깨우친 거리


사진/ 일본 지성의 심장으로 불리는 간다고서점 거리. 필자가 오래된 책을 둘러보기 위해 고서점을 찾았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여기서 인생을 배우고 앎을 깨우쳤노라고 입을 모은다. <라쇼몬>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작품 속에서 이곳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곳은 어느 책방의 2층이었다. 스무살인 그는 서가에 걸쳐진 서양풍의 사닥다리를 올라가 새로운 책을 찾고 있었다. 모파상, 보들레르, 스트린드베리, 입센, 쇼, 톨스토이….

이윽고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책등에 박힌 글자를 더듬어 나갔다. 거기에 죽 꽂혀 있는 것들은 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기말 그 자체였다. 니체, 베를렌, 공쿠르 형제, 도스토예프스키, 하우프트만, 플로베르….

그는 어두컴컴함과 싸우면서 그들의 이름을 세어나갔다. 하지만 책들 스스로도 나른하고 울적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서양풍의 사닥다리를 내려오려고 했다. 그러자 마침 그의 이마 위의 갓이 없는 전등 하나가 갑자기 툭 하고 불이 켜졌다. 그는 사닥다리 위에 멈춰선 채로, 책들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점원과 손님을 내려보았다. 그들은 묘하게 작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모두 아주 초라해 보였다.

‘인생은 한 구절의 보들레르보다도 못하다.’

그는 잠시동안 사닥다리 위에서 이러한 그들을 둘러보고 있었다.”(<어느 바보의 일생>에서)

사닥다리 사이로 지식이 흐르네

사진/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 거리에는 156개의 전문 고서점이 모여있다.
서너 시간 비좁은 책방에서 이책 저책 뒤지다 보면 정신은 희열을 거듭하나 육신은 지칠 대로 지친다. 배가 출출한 지성들을 위하여 간다 고서점 거리는 값싸고 풍성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이곳은 도쿄에서도 가장 유명한 중화요리와 카레라이스의 거리다. 저우언라이가 일본 유학시절 자주 들렀다는 ‘한양루’에서 ‘용수루’, ‘양자강’, ‘삼행원’ 등의 유서 깊은 중국 음식점이 즐비하며, ‘바라라이카’라는 러시아 음식점도 있다. 그래도 이곳의 별미는 카레라이스다. 지금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외식으로 카레라이스를 먹는 경우가 드물지만 예전에 외식 하면 돈가스 아니면 카레였다. 밥도 많이 주고 감자를 비롯하여 들어가는 모든 것이 큼직큼직하게 나오는 간다 거리의 카레는, 한푼이라도 아껴서 책을 사려는 학생이나 지식인들에게 그야말로 구원의 먹을거리였다. 사는 것과 먹는 것이 풍성해진 요즘이지만 그 맛을 못 잊어 이곳을 찾는다는 이가 여전히 많다.

후식으로 먹는 케이크와 파르페도 유명하여, 어느 작가는 죽기 직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나와 그것들을 마지막으로 사주었다고 한다. 간다 거리를 일요일에 거닐다 보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눈에 자주 띈다. 잠시 쉴 겸해서 카페에서 아버지는 커피를, 아이는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무슨 랜드와 할인 마트나 돌아다녀야 하는 서울의 아이들 생각이 난다.

사진/ 위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 청계천 고서점 거리.
그리고 사라지는 청계천 고서점가를 떠올린다. 중학교 때 용돈을 아껴 그곳에서 샀던 책들. 서머싯 몸 편의 <세계 단편문학 전집>, 김재남 교수의 <셰익스피어 전집>, 그리고 <니체 전집>. 그것들은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던가. 서울시의 청계천 복원계획은 죽은 하천도 되살려야 하겠지만 죽어가는 ‘책의 하천’도 살려내야 할 것이다.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라는 책은 신간서점과 고서점의 차이에 대하여 “전자가 출판사와 도매상을 통해 공급받은 서적의 대부분이 위탁판매인 데 반하여, 후자는 주인이 자기자금을 투입해서 구입한 것으로, 말하자면 서점 주인의 장서라는 점에 있다”고 설명한다. 고서점이 자본의 은하계 질서에 저항하는 소행성이라면, 그 주인들은 자본의 문화 논리에 반기를 드는 독립 소상인이라 하겠다.

또한 도서관과 고서점의 역할에 대하여 헷갈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장서수집에는 한계가 있다. 시대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인 <선데이 서울> 같은 잡지는 물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잘 보관하고 있지만, 80년대 말 잠깐 서점 매대에 얼굴을 내밀다가 사라진 <관상학 25시>라는 책은 어느 도서관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사진/ 일본 고서점의 내부 구조. (자료: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도서관엔 없어도 고서점엔 있다.

얼굴을 보면 척하고 좋아하는 체위까지 알며, 어느 나이에 순결을 잃는다는 다소 낯가지러운 관상정보가 등장하는 그 책은 고서점 아니면 어디서 구할 것인가. 게다가 예산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도서관에 무얼 기대한다는 것이 애당초 무리다. 그리고 책이란 자기 것이 되어야 비로소 애정이 생기는 법이고, 당장 안 읽고 필요 없더라도 언젠가는 읽을 때가 있고 쓸 데가 있는 유용한 물건이다.

5년 전 간다 고서점에서 세계적인 페르시아학의 대가인 이토 기쿄의 명저 <조로아스터 연구>를 부담되는 가격 때문에 망설이다 사지 못했다. 그 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연구서를 죄다 사 모았지만 그 책만은 다시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간다 거리에서 그 책을 손에 넣어 내 서가의 빈자리를 채우게 될 때, 나는 진리의 배화교도가 되어 아후라 마즈다가 주재한다는 천국으로 승천하리라.

도상학 연구가alha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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