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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마침내 강산에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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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2-10-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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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의 로커로 침잠의 나날 보낸 뒤 7집 <강영걸> 내고 새로운 출발

사진/ 음악 생활 10년 중에서 4년의 방황 끝에 7집 음반을 들고 대중 곁으로 다가온 강산에. (김종수 기자)
1996년 6월 서울대 문화관이었다. 음반 사전심의 철폐를 축하하는 라이브 콘서트 ‘자유’가 처음 열렸다. 1집을 발표하고 활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로커 윤도현이 <큰 별은 없어>를 들려주며 막을 열었다. 1·2집을 통해 이미 정상급 로커로 우뚝 선 강산에는 능숙한 무대 매너로 <예럴럴라>와 <돈>을 흥겹게 들려줬다. 공연을 지켜본 문화담당기자 경력 20년차의 한 선배는 “윤도현의 가창력이 뛰어나긴 한데 강산에의 카리스마에 비하면 아직 아쉬운 게 많다”고 촌평을 날렸다.

차분한 관조에도 특유의 건강미 여전

6년이 지난 지금, 같은 기획사 소속의 두 로커는 차선이 전혀 다른 길을 질주하고 있다. <아웃사이더> <삐딱하게> 등 거친 매력의 반항기로 가득 찬 강산에는, 심지어 태극기의 ‘성스러움’을 노래로 비웃던 그는, 98년부터 긴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4집 <연어>를 내고 미국의 사막을 떠돌며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했다. 4년이 흘렀고, 오랜 방황 끝에 찾은 평온함으로 7집 <강영걸>을 냈다. 호사가적 취미로 두 로커를 비교하려 해도 강산에는 오래전에 차원이 다른 길로 들어섰다.


“20대 그리고 30대 초반까지는 주변의 상황에 집중하면서 내면보다 바깥을 향해 목소리를 냈잖아요. 누가 툭 치면 ‘뭐냐’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식이었죠. 그러다가 낯설고 두렵고 혼돈스런 상황을 맞이했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 삶의 지혜를, 이건 너무 큰 말인데, 아무튼 어떤 부분의 해소가 꼭 부딪쳐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4년 만에 낸 앨범은 ‘질러주는’ 느낌의 과거와 달리 차분한 관조의 느낌이 강하다. 오래도록 호흡을 맞춰온 일본인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하치 히로후미 대신 본인이 직접,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것도 색깔을 바꾸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발가벗은 채로 알몸으로 나는 거북이를 만나고 있네/ 발가벗은 채로 알몸으로 나는 태양 아래 춤추고 있네/ …/ 참 오랜만에 내 안의 숨겨진 느낌 그 무엇/ 벗어 던져버린 옷만큼 나를 너무 가볍게 해(< Sun tribe > 중에서)

< Sun Tribe >나 < Moon Tribe > 같은 노래가 긴 여행 끝에 나온 대표적인 곡이다. 스타일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강산에 특유의 자유로움이나 건강미는 여전해서 더 큰 변화는 현실 비판성 가사가 사라졌다는 게 아닐까.

“제가 많이 달라졌다고 해도, 사람들이 금방 잘 적응하지 않겠어요? 데뷔했을 때만 해도 염색하고 다니는 건 상상도 못했잖아요. 꽁지머리 하고 다닌다고 이상스런 눈초리로 날 쳐다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낯설다’는 건 순간이죠.”

그런데 <명태>를 듣는 순간 <라구요>를 들려주던 첫 데뷔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라구요>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었지만 <명태>는 아버지를 기억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노래 되고 시가 되고…”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매력적인 보컬이다. 그런데 갑자기 돌변한다.

영걸이 왔니? 무눙이는 어찌 아이 왔니? 아바이 아바이 밥 잡줬소. 상구 아이 왔니?

함경도 사투리로 부르는 일종의 랩이다. 과연 저런 게 노래가 될까 싶은 생각이 들 법도 했을 터인데 명태의 쓰임새를 불러젖히는 랩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준다.

내장은 창란젓 알은 명란젓 아가미로 만든 아가미젓 눈알은 구워서 술안주하고 고기는 국을 끓여먹고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명태 그 기름으로는 또 약용으로도 쓰인데이제이요 “소재를 찾을 때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해요. 국내에서 하는 랩을 본고장에 가서 들으면 아무래도 뭔가 달라요. 같은 영어라도 흑인들이 하는 말은 악센트나 억양이 다르기 때문일 텐데, 여기에 착안해 우리 사투리에 깃든 운율감을 노래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죠.”

성찰로 본향 찾아… “아내는 최고 응원군”

사진/ "강산에의 진짜 세계를 즐겨라." 강영걸이라는 나라에서 발행한 여권 형식의 7집 음반 재킷.
함경도 사투리의 맛을 살리려고 속초의 아바이 마을에 가서 녹음을 하고, 어렸을 적 세들어 살던 주인집 부부의 함경도 말씨를 떠올려가며 곡을 썼다. 경상도 사투리를 끌어들인 <와그라노>도 사투리 랩이다. 자기를 조용히 성찰하는 태도와 무기력은 확실히 다르다는 걸 이런 노래들이 보여준다.

<명태>를 통해 그리워하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과 앨범 제목 ‘강영걸’은 서로 맞물려 들어간다. 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사실 기억나는 게 없다.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면서 ‘인생이 정말 금방이구나’ 하는 절절한 느낌도 들었고, 후배들 대부분이 아기를 놓은 걸 보다 문득 난 애 놓을 나이가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아버지에 대해 뭔가를 남긴다면,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강영걸이 아니겠어요?”

앨범 재킷이 재밌다. 강영걸이라는 나라에서 발행한 여권 형식이다. 강산에의 진짜 세계에 들어와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다.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로 시작되는 <지금>은 강산에 최초의 러브송 발라드다. 대부분의 곡과 가사를 그가 직접 쓰다시피 했는데, 이 가사는 ‘나비’가 쓴 것으로 돼 있다. 그의 아내 다카하시 미에코의 작품이다. “<넌 할 수 있어> <더 이상 더> <어쩌면> 등의 가사를 아내가 썼어요. 일본말로 쓴 걸 제가 적절하게 옮긴 것이긴 하지만요. 곡 발표 당시에는 외국인에 대한 저작권 보호가 없어서 일단 제 이름으로 냈는데, 제 최고의 팬이자 응원군이라고 할 아내가 실은 제법 재능이 있어요.”

최고의 응원군이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할 일을 제쳐두고 아이 먼저 낳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했던 이도 아내였고, 방황하는 남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을 이도 그였을 터인데, 늘 변함없이 자기를 지지해준다고 한다. “한 세계에 갇혀 고여 있는 걸 싫어해서 제가 흘러가는 모습도 자연스럽고 긍정적으로 받아줘요. 이제 아이도 갖기로 했어요.”

창의적 일꾼과 함께 구르는 돌처럼!

음악활동 10년 중에 4년을 그냥 보냈으니 요즘처럼 힘들어진 가요계에서 자기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지 걱정한다. 원래 거북이 스타일이었으니 조바심치지 말자고 스스로 다잡는다고 한다. “곤조라고 하죠. 근성이 남아 있으나 예전처럼 쉽게 흥분하지는 않아요. 혹시 앨범이 많이 팔리면 일종의 크리에티브 집단을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의 의식을 끄집어내고 발전시키는 게 아트인데, 우리에겐 아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은데다 너무 상업적으로 치닫고 있어요. 유명 작가보다 더 창의적인 숨은 재능꾼을 모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요즘 꿈이에요.”

영화 <트레인스포팅>에서 음악을 담당했고, 레이브 음악의 선두주자 ‘언더월드’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토마토’ 같은 집단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 1년 반 전에 만났을 때 그는 “록을 외치는 나 자신이 록 안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당신에게 록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롤링스톤스라는 밴드 이름처럼 구르는 돌 같은 게 아닐까요. 의문을 던지며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일체의 행위! 저항하고, 직선적으로 분출하는 것도 있지만.”

삶에 한획을 그은 강산에를 직접 만날 수 있다. 10월15∼20일 서울 제일화재 세실극장(02-3272-2334)에서 ‘지가예 강영걸이라예∼’라는 이름으로 콘서트를 연다. 과거의 곡과 새 곡을 절반씩 부른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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