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소장 건축가들 정체성 찾기 몸부림… WTO 외풍 앞두고 새건축가협회 창립 추진
“서울은 평당 5만원, 지방은 2만5천원. 이런 식이죠. 어떤 설계사무실은 아예 평당 1만5천원에 도면 그려준다며 전단을 만들어 뿌린다고 해요. 완전히 부동산 개발업자와 다를 바 없죠.”(이충기)
“설계입찰 때 심사비리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의식 있는 젊은 대학교수들조차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죠. 워낙 공고한 ‘침묵의 카르텔’이니까요. 하지만 건축사협회 차원에선 한번도 이를 징계해본 적이 없어요.”(함인선)
설계시장 전면 개방에 위기감 고조
지난 5일 밤 서울 서초동 한 설계사무소에 건축가 6명이 모였다. 한만원(한도시건축 대표)·함인선(AI건축 대표)·권문성(아틀리에17 대표)·이충기(한메건축 대표)·옥태범(창조건축 소장)·안우성(온고당 대표)씨. 우리나라 건축계의 허리격인 중진·소장 건축가들이다. 각종 설계와 강의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데도 세달째 무리해가며 매주 모임을 갖고 있다. 올 연말께 새건축사협회(www.ka2002.org) 창립을 앞두고 준비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나라엔 건축 관련 전문인들을 위한 단체가 한국건축가협회, 대한건축사협회, 대한건축학회 등 이미 세 군데나 된다. 그런데 왜 새로운 단체가 또 필요한 걸까?
새건축사협회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2005년부터 가동되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으로부터 비롯됐다. 앞으로 3년 뒤부터는 다른 서비스시장과 마찬가지로 설계시장도 전면 개방된다. 국내 공공기관에서 발주하는 모든 프로젝트도 3억원 이상이면 반드시 국제입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판에 참가하는 자격이 문제다. 세계건축가연맹(UIA)과 상호인증을 거친 건축사만이 이 세계시장에서 뛸 수 있다. UIA는 이 상호인증의 전제로 5년제 건축학교 등 국제적 수준의 교육을 못박아놓았다. 우리나라 건축가들도 세계 무대에 나서려면 건축교육을 전면적으로 손질하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인증단체를 세워 발빠르게 UIA와의 협상에 대비해나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95년 개방이 결정된 이후 건축 관련 세 단체 중 어느 곳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올해 초엔 이 세 단체가 함께 한국건축단체연합(FIKA)을 세워 UIA와과 협상을 하기로 했는데 이마저도 손을 놓아버린 상황이다.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면 세 단체 중 건축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속한 단체는 건축사협회이므로 FIKA를 견인하는 힘은 여기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함인선씨는 “건축사협회엔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많아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건축사협회에 속한 7천명 회원 가운데 WTO 시장개방과 관련해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맺을 사람은 20%도 채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장개방이 자신의 직업과 공간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예측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은 결국 따로 모일 수밖에 없다. 새건축사협회는 창립 뒤엔 FIKA에 합류해 협상에 적극 참여하도록 압박할 계획이다.
권문성씨는 “WTO 개방은 위기도 될 수 있고 기회도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건축가도 상호인증을 거치고 나면 중국이나 동남아에 가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내실 없이 개방했을 때는 건축계와 도시환경이 문제입니다.” 이충기 위원은 “지금도 우리나라 건축주들은 외국 건축가라고 하면 상대국에 직접 찾아가 설계해달라고 며칠씩 빈다”고 꼬집었다. “그렇다고 외국 건축가들이 반드시 성의 있게 해주냐 하면 꼭 그렇지 않거든요. 한국 클라이언트들을 ‘봉’으로만 보고, 자기 작품집에는 나중엔 싣지 않을 설계를 해주는 일도 있어요.” 한만원씨는 “주변 거리와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게 건축가 개인의 기량만 뽐내는 무국적 건물이 난입할 것도 문제”라고 걱정한다.
무국적 건립 우려… 공공·윤리성 확보
새건축사협회는 ‘건축사’라는 면허증을 지닌 직능집단에 머물지 않고 ‘건축가’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전문가이길 원한다. 그런 이유에서 함인선 위원은 특히 새건축사협회의 과제로 공공성과 윤리성 회복을 꼽는다. 가령 저소득층 불량주거단지 개선사업, 가로계획·가로조형물 등의 디자인 등에 참여하고 설계심사비리 거부 등 윤리규약을 지켜나가는 일 등이다.
지난 2000년 법개정에 따라 기존 건축사협회가 임의단체로 규정됐다. 기존 건축사의 10%만 가입하면 새 협회를 꾸릴 수 있는 길이 법적으로 열린 셈이다. 하지만 사단법인 등록과 재력·인력의 확충 등 새건축사협회가 갈 길은 멀다. “우리가 못해온 이런저런 일들을 꼽아보면 힘빠지지만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면 신나요. 그 맛에 매주 머리를 맞대죠.”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새건축사협회 창립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건축가들. 이들은 국내 건축계의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건축문화를 실현하려고 한다. (김종수 기자)









